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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영향을 끼친 사람 _ 장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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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복협 작성일16-04-06 15:30 조회7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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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페 이터니타템", 새 학기 수업 첫째 날 다짜고짜 학생들을 복도로 불러내 어느 청년들 사진을 보여주셨던 선생님의 속삭임이었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틀어주셨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한 장면을 재연하신 거였다. 자신의 교실 창문에 흑백 사진 몇 장을 어설프게 붙여놓으시곤, 태연하게 학생들을 복도로 불러내 사진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하셨다. 우리는 새 학기 첫째 날의 어색함도 미처 떨쳐내지 못한 채로 엉거주춤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얼추 다들 사진을 눈에 담자, 선생님께선 우리 뒤에서 사진의 어설픈 상태보다 더 어설프고 음산한 목소리로 "카르페, 카르페 이터니타템"이라고 속삭이셨다. ‘아니, 애초에 대사가 틀리지 않았나?’ 라고 생각했다.

 "현재를 살아라"라는 뜻의 "카르페 디엠" 대신 "영원을 살아라"라는 뜻의 "카르페 이터니타템"을 속삭이신 이유가 있었다. 창문에 붙어있던 사진의 주인공은 에콰도르에서 순교한 다섯 청년이었고, 선생님께선 이들의 삶을 소개하며 현재를 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영원을 살라 하셨다. 잘 와 닿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왠지 영화나 따라 하는 허세 가득한 선생님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치부하기엔 묵직했다.

 문학을 가르치는 분이셨다. 그래서 일주일 중 하루는 꼭 수업 시간에 학생들을 학교 도서관으로 데려가 책을 고르게 하고, 빌리게 하고, 읽게 하셨다. 분명 내 기억에 다정하거나 살가운 분은 아니었는데, 내가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정확히 아시곤 그 흐름 안에서 내가 다음에 읽으면 좋을 책을 추천해주셨다. 따로 검색하지 않고 그냥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그 책을 직접 가져다주시는 것 또한 당연했다. 학기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이제 아예 분야별 책 추천 목록을 작성해 나눠주셨다. 도서관에 갔을 때 선생님이 안 보이면 이 목록을 참고하라셨다. 권장도서 목록 따위, 지루하다고만 느꼈는데 이분의 목록은 왠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렇게 한 2년 이 선생님과 함께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에 왔다. 새롭게 배우는 게 많았고, 생각이 넓어지는 것도 느껴졌다. 이런 성장과 더불어 내가 읽는 책도 훨씬 다양해졌다. 책 한 권을 읽고 나면 연관해서 더 읽어보고 싶은 책이 적어도 꼭 두세 권씩은 생겨서, '읽어야 할 책' 목록에 항목이 늘어만 갔다. 그러다 내가 만든 그 목록에 괜히 싫증이 나서 옛날 그 선생님의 목록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내가 대학에서 배운 모든 것이 그 목록에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싶어 할지 미리 안 것 마냥, 더 읽어봐야겠다고 적어둔 작가들이 그 목록에 있었다. 그냥 그 목록을 훑어보는데, "아, 여기에 있는 책만 진작 다 읽었어도 대학 안 왔어도 됐겠다!"란 탄식이 흘러나왔다.

 선생님께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빨간 깃털을 꽂은 쑥색 중절모를 쓰고 오셨다. 하루는 그렇게 중절모를 쓰시는 것도 모자라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오셔서 자신의 인공심장박동기 얘기를 들려주셨다. "조용한 새벽 시간엔 이 박동기가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똑딱똑딱'하는 소리가 나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 딸은 이 소리를 듣더니 나보고 피터팬에 나오는 똑딱악어 같대." 그렇게 혼자 한바탕 웃으시곤 수업을 시작하셨다. 왜 이렇게 그 이야기를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 걸까?

 

장지혜(아름마을교회)

"백수라는 변방의 위치를 마음껏 탐구하고 있는 중. 변방은 창조공간이라는 말과 건강한 백수는 이 시대 생태계 복원을 위한 창조주의 모략이라는 말을 굳게 믿으며 버팅기는 중이다."

jkayj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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