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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근원칼럼 : 소금기를 상실한 소금: 공동체기를 상실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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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09-09-29 00:00 조회86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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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기를 상실한 소금: 공동체기를 상실한 공동체?!
 
 
드라마 <선덕여왕>에 보면, 김유신이 어느 순간 자신이 지닌 ‘위력’을 자각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혹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비록 우리 스스로 연마한 것은 아니지만, 주님께로 받은 것이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인 것은 아닐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 또는 “구원”이 함축하고 있는 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은사들을 쏟아 부어주셨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것은, 우리 주님의 보혈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이 한가지로 연합하여 주님의 교회가 되고, 다 한 몸이 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 것이 아닐까?! 유대인/헬라인, 종/자유자, 남자/여자, 어중이/떠중이 할 것 없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연결되고 연합되어 새로운 나라를 이루고, 이 땅에서부터 그 나라에 서로 소속할 수 있게 된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복음의 요체요, 하나님 나라의 으뜸가는 비밀일 것이다. 따라서 교회가 만일 공동체성을 상실한다면, 이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그러나, 작금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어떤가? “교회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라는 궁색하고 서글픈 변명에 급급하지 않은가!
 
물론, 오늘날의 거대도시 안에서 복음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한꺼풀 더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하다. 산업화 덕분에 도시가 급격히 팽창하면서 주거 형태도 자연히 아파트와 같이 이웃 세대와 분리되고 단절되는 구조로 변하였고, 모든 것이 분업화/대형화, 화폐화/자동화되면서, 굳이 타인과 접촉 없이도 생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개인주의 생활방식이 발달하게 되었다. 더구나 오늘날은 디지털의 발명(디지털대학, 온라인 쇼핑 등)으로 이런 탈공동체성이 한층 가속화하고, 심지어 사람들은 가상의 공간 안으로 은닉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지 않은가?!
 
인간이 비록 만물의 영장이라고는 하지만, 낯선 거대군중 가운데서 고독하고 왜소한 존재로 위축된 상황에서는, 더구나 매스컴이 연일 흉악범에 대한 소식들을 쏟아내는 상황에서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기보다 가능하면 접촉을 피하고, 도리어 서로 경계하고, 지례 소외시키는 것이 지혜로운 생존 전략으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도시의 생리를 쫓아 공동체를 기피하거나 파괴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도리어 안전하고 푸근한 시공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도시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은 이제 익명성에 기반한 망극(亡極)한 “반-공동체성”의 메트로-구조 속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 셈이다.
 
더구나, 현대의 도시 교회는 이런 “반-공동체성”에 편승하여, 서로를 적당히 은익하거나 소외시킴으로써 도리어 ‘편안한’ 종교생활을 보장해 주어야 ‘좋은’ 교회로 각광을 받을 수 있으니 이래서야 어찌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의도하신 공동체를 이루었다 할 수 있으리오? 공동체성을 상실한 이 땅의 교회들은, 마치 소금기를 잃은 소금과 같이 거름으로도 쓰지 못하여 길바닥에 버리워서 사람들에게 밟히고 있는 형국은 아닐까? 한 마디로, “교회가 이 시대의 풍조와 가치관에 순응하게 되는 주된 원인은 공동생활이 산산조각이 났기 때문이다.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우리는 [세상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의 소외와 외로움의 문제, 곧 정서적-사회적-영적 필요에 대한 욕구로 치자면, 산업화/도시화 이전의 사람들보다 현대인들이 도리어 훨씬 더 갈급한 상태에 놓여 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목욕물 버리다가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복음인 것은 진정한/새로운 공동체를 약속해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실 공동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거니와, 존재 의미를 찾을 수도 없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는다는 확신, 우리가 ‘괜찮다’는 확증이 필요하다. 우리의 정체성과 안정성은 그러한 사랑과 확증에 달려 있다. 그 때라야 우리는 안전함과 안정성, 곧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음을 느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기쁜 소식은, 이런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것이다. 주님께서 가져오신 것은, 우리 개개인의 구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나라의 가시적/시공간적인 구현(具現)이 바로 이 땅에 남겨 놓으신 ‘대안 커뮤니티’로서 지역교회이다. 또한 패러 처치 구조인 캠퍼스 내의 기독 동아리와 청년대학부 모임도 매한가지이다. 이 사랑의 네트워크 안에서 우리는 이 땅의 논리에 휩쓸려서 서로 왕따시키거나 ‘힘겹게’ 경쟁할 필요가 없으며, 도리어 ‘기꺼이’ 서로 인정해 주고 용납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도리어 “충만”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의 성령공동체는 바로 우리 주님의 몸된 교회의 공동체성이 얼마나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얼마나 유여하게 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실례로서,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새로운 사회”였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확증, 위로, 도전을 공급하는 환경이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 가능하게 되는 사랑은 세상 속에서 좀 더 신실하게 행동하기 위한 필수불가결의 내적 권세를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가 속한 지역교회와 캠퍼스 안의 모임은 어떤 모습을 띠는가?! 그리고 우리에게서, 이런 ‘새로움’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혹 우리가 자주 실패하고 이 세상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우리의 삶이 공동체와 유리되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아니면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여전히 예전의 그 낡은 세상 가치와 동일한 가치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은 아닌가? 이 땅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삶, 작은 그리스도로 사는 삶은 공동체의 지지와 격려 없이 혼자서도 가능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과연, 끝까지 나를 용납하고 책임져 줄 공동체가 있는가? 반대로 나는 우리 교회/동아리를 할 수 있는 대로 책임지고자 하는가?
 
우리 미션의 중심은 바로 이런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요, 우리 미션의 성패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공동체를 이루는가에 달려 있다. 비록, 역사상 또 한 번의 전환기라고 하는 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잘 어울리는 공동체상은 어떤 모습일지, 아직은 그 총체적이고 구체적인 윤곽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복음 공동체에 대한 비전의 유무가 향후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권영석 목사/학복협 상임대표
 
*이 글은 <물근원을맑게> 92호에 실렸으며 본 회의 동의를 구한 후 사용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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