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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근원칼럼]세속화의 위협으로 인한 복음의 위기를 극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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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0-02-10 00:00 조회9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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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근원 칼럼
 
세속화의 위협으로 인한 복음의 위기를 극복하자!
 
 
<한국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대한 조사> 두 번째 연구가 작년 말에 있었다. 우리의 주요 관심사 하나는 역시 그리스도인 대학생과 비그리스도인 대학생 사이에 과연 변별력있는 차이가 있는지 하는 것인데, 한 마디로, 요즈음 기독 청년들은, 의식이나 관념은 [아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실제 생활 태도나 행습은 갈수록 세속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적으로, 성적인 관념이나 경험에 대한 조사 문항을 살펴보자.
 
예컨대, 혼전 성관계에 대한 태도를 보면,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응답한 경우는 기독인(58%, 2006년 59.6%)이 비기독인(14%, 2006년 15.2%)보다 단연 높지만, ‘자연스런 감정의 표현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비기독인 18%; 기독인 5.4%), ‘사랑하는 사이라면 있을 수 있다’(46.2%; 20.2%),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면 있을 수 있다’(17.3%; 14.8%)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상당 부분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 실제 성 경험 유무에 대해서는, “있다”로 대답한 기독인(13.6%)은 비기독인(21.8%)보다 적었고, 과거를 후회한다고 한 기독인(30.9%)은 비기독인(7.8%)보다 단연 많았다. 이는 충분히 변별력이 있는 차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포르노그래피를 본 경험은 기독인과 비기독인의 숫자가 거의 차이가 없으며(기독인의 73.3%; 비기독인의 72.7%), 포르노그래피를 시청하는 평균 빈도 역시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생활의 틀 덕분에 기독청년들의 의식과 관념은 여전히 전통적인 기준을 견지하는 듯하지만, 실제 생활은 오십보백보로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대의 행습을 그대로 좇아가고 있다 하겠다.
 
요즈음 들어 캠퍼스 복음화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교회 안의 청년대학생들이 줄어드는 데는 여러 요인들이 오비이락으로 작용했겠지만, 개신교의 브랜드 가치 급락 현상과 맞물려 있음을 부인할 순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기독교 인지도 실추의 밑바닥에는, 이 조사 연구가 보여주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세속화와 지역 교회들의 세속화가 상당부분 원인제공을 했음은 명백해 보인다. 신자와 비신자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고, 교회의 모습이 사회의 모습과 비교하여 변별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굳이 기독교 신앙을 찾고 교회를 기웃거릴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사실 그리스도인들의 세속화, 그리고 교회의 세속화가 초래하는 피해는 엄청나다. 이는 그저 한 개인이나 한 집단을 부패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 전체를 파괴한다. 이 세상 사람들의 세속화는 본래 나빴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이며, 이 세상의 세속화는 본래 병들었던 세상을 좀 더 병들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기독교인의 세속화와 교회의 세속화는 그저 그 한 사람을 조금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한 교회를 병들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 전체를 무력하게 하고 회생불능으로 만들어 버린다.
 
왜냐하면 세속화의 이름으로 세속화되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성도(거룩)의 이름을 표방하면서 세속화되는 것은 결국 ‘성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며, 성도의 존립 기반인 기독교 전체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세속화는 이처럼 한 개인의 세속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세속화로 연결되게 마련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일면, 실용을 종교로 숭상하는 경제개발과 그에 따른 경제성장의 혜택을 톡톡히 누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한국 교회의 성장 동력을 사회경제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보자면, 이 개발실용의 흐름에 편승한 측면이 없다 할 수 없으니,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실용의 옷을 입히자 많은 사람들이 일거에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한국 교회는 교회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단기간 내에 성장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가? 혹 교회의 구조와 조직은 여전히 건재해 보이는데, 그 내용물은 전혀 다른 이물질을 담고 있는 꼴이 아닐까? 그래서 그야말로 기독교가 아니라, X독교로 불리게 된 것이 자업자득은 아닐런지? 실용이 복음의 자리를 대신한 결과, 실용이 종교가 되는 정도를 넘어서서, 아뿔싸 이제는 종교가 실용이 되고 말았다.
 
사실이 그렇지 아니한가? 신앙을 지키고 교회에 출석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세속 사회의 젊은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생활태도와 행습에 젖어서 산다면, 게다가 그것도 신앙의 이름으로, 앞 다투어 명품을 찾고, 일류를 추구하느라 이전투구하고, 일확천금을 꿈꾸고, 쾌락을 좇으며, 기득권을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 과정에서 편법과 불법을 일삼는다면, 교회 안과 교회 밖의 변별력 있는 차이를 기대하기란 애초 무리일 수밖에 없다. 나아가서 이런 실추된 인지도를 극복하지 못한 채로 세월이 흐르게 되면 기독교는 점점 종교화(하나의 종교, 그것도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는 서양 종교로 전락)하게 되고 게토화하게 마련이다. 그리되면 기독교는 사회와 완전히 유리 단절된 채 ‘종교’라는 무덤 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이는 실로 위험천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종교와 세상, 종교와 일상의 분리가 일어나면 종교는 이때부터 그 영향력을 급격히 상실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독교 세속화의 귀결점은 반기독교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종교화’이다. 즉 기독교 신앙을 버리기는커녕 도리어 하나의 종교로 더욱 더 정중하고 깍듯이 모시지만, 사실 이는 불신앙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의 신앙이 삶 전체를 통합하는 핵심가치나 목표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 채 그저 종교의식에 참여하고 소위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것에 국한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종말이자 복음의 전도(顚倒)이다. 그리되면, 사단은 그야말로 손안대고 코푸는 격으로 기독교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도 기독교와 복음의 영향력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종교적인 열심을 낼수록 우리는 도리어 종교적인 의식과 행위에 그만큼 더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하는 반면, 사단의 수하에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그만큼 덜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인지도가 나빠진 상황에서는, 종교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우리의 행위는 그저 광신자의 허황한 광대놀음으로 비칠 뿐이며, 심지어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세상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되기보다는 그야말로 ‘너나 잘하세요’식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되기 때문에, 사단은 우리의 종교 생활을 겁낼 이유가 없으며, 도리어 열심히 더 잘하도록 꼬드겨서 모든 에너지를 ‘종교 생활’에 결집시키고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오지 못하도록 하려 들 것이다.
 
이는 실로 섬뜩하고도 끔찍한 일이다, 혹여 우리의 신앙이 이처럼 일상/세상과 분리된 종교생활로 축소되고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이 부지불식간에 사단의 음모에 일조하는 것이 된다면, 우리의 종교생활이 불신자들과 우리 사이의 불신과 곡해의 벽을 점점 더 높이 쌓는 결과가 되어서 우리의 복음전파가 도리어 광신의 표시요, 뭔가 일상과 동떨어진 ‘종교’ 선전으로 비치게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도리어 귀를 닫게 만들고, 실은 구원의 유일한 희망인 이 복음이 귀찮은 빈대처럼 기피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말이다. 한 마디로 복음의 진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바로 우리 자신의 종교생활이요, 복음의 영광스런 빛을 가리는 것이 다름 아니라 교회라고 한다면, 이런 자가당착을 어찌할 것이며 장차 그 심판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혹 그동안 우리 한국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이런 자충수(自充手)를 두어 온 것은 아닐까? 뭔가 분주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것이 도리어 우리의 무덤을 더 빨리 파게 한 것은 아닐까? 교회의 이름으로 뭔가 열심히 한다고 해 왔는데, 교회와 세상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복음의 색깔은 더욱 칙칙해진 것은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쩌면 다른 것은 다 그만 두더라도 차라리 이런 ‘종교’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최우선의 과제가 아닐까? 더 이상 우리의 신앙이 종교의식이나 종교적인 활동 위주에 갇혀 있어서는 안된다. 주님께서 이 누추한 땅에 오시고, 그 처절한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저 종교적인 의식이나 심리적인 위안을 위한 차원으로 축소되어선 안된다. 생사를 걸고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하는 복음이요, 신명을 다 바치고 혼신을 다하여서 전하려는 이 복음이 바로 생명의 도(道)임을 각인시킬 만큼은 단호하고 철저해져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당분간은, 말은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하며, 또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을 많이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분열과 열병을 통해 위용을 자랑하는 군대가 아니라, 눈에 잘 띄지 않지만/않기에 도리어 효과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게릴라 작전을 구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은 우리가 믿고 고백해 오던 복음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복음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주변과 세상에는 어떤 의미로 전달되었는지, 원점으로 내려가서 차분히 돌아보고 자숙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때가 아닐까?!
 
20대 청년기에 들어선 학복협의 향후 10년간, 우리는 차라리 무력해 보이는 소수의 남은 자들이 되더라도, 그래서 우리의 동료들에게 ‘뭘 그렇게까지’라는 핀잔을 듣더라도, 나아가서 왕따를 당하더라도, 종교 행위나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전 존재와 삶으로 예수님을 붙좇는 신실한/믿음 있는 종들이 되도록 하자! 새삼 뭐 특별한 걸 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믿음대로 좀 해 보자는 건데, 그게 그리도 무리일까? 그리스도의 청년들아!
 
 
권영석 목사 | 학원복음화협의회 상임대표
 
 
 
*이 글은 <물근원을 맑게> 93호에 실렸으며 본 회의 동의를 얻어 출처를 밝히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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