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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특집 2] 이성 교제 가이드라인 2 _ 권영석 & 송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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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복협 작성일16-05-09 12:08 조회2,02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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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 어떻게 할 것인가: 연애의 기술과 함정

 첫 사랑이 실패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방법론에 대한 무지가 한 몫을 톡톡히 한다. 연애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연애가 어떤 단계를 거치면서 진행되는지, 서로 간의 소통방식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지, 또 일이 잘못될 경우 갈등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등등 모든 게 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불가불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이다. 때문에 어쩌면 첫 사랑은 그 이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실험용인 측면이 다분한지도 모르겠다.

 연애 관계가 그 특성상 동성 간의 우정 관계와 유사하며, 또 이성 교제 역시 우정을 그 모판으로 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부모와 자녀 또는 형제 관계나 사촌 관계 등의 혈연 관계를 넘어서는 타자 관계는 대개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특별한 호감 곧 우정을 느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모든 인간관계가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존재의 외연을 공유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존재의 내면을 나누는 것으로 서서히 진전되어 가게 마련이다. 서로 통성명을 하는 정도의 일면식에서 출발하여, 서로 아는 사이가 되고, 그저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하는 껍질을 벗기고 들어가면, 특별한 호감을 느끼고 끌리는 단계 곧 서로가 서로에 대해 뭔가 특별한 관계에 있음을 피차 의식하고 전제하기 시작하는 단계로 발전한다.

 이런 '특별한' 사이의 사귐(동사)이 어느 정도 잦은 빈도로 또 어느 정도 충분한 기간 지속되면, 이제 '친구'라는 호칭을 쓸 수 있는 대상으로 분류·인식할 수 있게 되며, 이때로부터 '친구'는 일종의 관계 상의 신분(명사)을 얻게 되며, 모든 신분(정체성)이 그렇듯이 나름 별도의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서로가 서로의 인격의 바운더리 안으로 피차의 대상을 받아들이게 되는 셈인데, 이렇게 주체와 객체가 관계로 연결되고 나면, 이제 주체는 객체와 무관한 주체가 아니며, 객체 역시 주체와 무관한 객체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주체와 객체 외에 둘 사이의 관계라고 하는 제 3의 실재가 생겨나는 셈이며, 친구나 연인이란 바로 이 제 3의 소중한 실재를 함께 공유하는 비밀스런 사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분의 변화'는 상대의 인격을 내 인격의 경계선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므로, 모든 살아 있는(유기체) 관계가 그렇듯이, 그 객체와 더불어 어떤 식으로든 상호작용을 하게 되어 있다. 이런 제 3의 실재는 그저 친구라는 신분을 획득/소유하는 정적(靜的)인 성격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생명력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자라게 하며 또 서로를 점점 변화시키는 동적(動的)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제 3의 실재인 우정과 연정은 그 자체가 또 점점 더 자라나기도 하고 사그라들기도 하는 유기체적인 속성을 지닌다.

 이 때 두 사람 사이의 사귐을 가능하게 하는 경계선(바운더리)이 형성되는 것을 친구 곧 '우정 관계'의 탄생이라고 한다면, 그 경계선 안에 담아낼 실질적인 내용은 바로 우정과 연정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특권(권리)과 의무(책임)로 구성된다 하겠다. 특권이 우정의 수혜적인 측면이라면, 책임은 우정의 시혜적인 측면인 셈이다. 그리고 이 때 둘 사이에 이처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제반 활동을 통틀어서 소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화해 보자면, 우정과 연정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관계는 경계선 설정, 특권과 의무의 규정, 소통의 세 가지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관계 상의 문제가 발생했다면 이 세 요소 가운데 어떤 부분에서 서로 간의 이해 차이 내지 온도 차이가 있거나 장애물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물론 이 때 두 사람은 서로 간의 관계의 성격이나, 그 특성에 맞는 특권과 의무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나 한계를 번번이 함께 토론하거나 명문화하여 합리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의 마음 곧 인격은 인지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때로는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뭔가 가슴으로 공감이 가야/가면 흔쾌히 움직이게 되어 있다. 또 어떤 때는 마음의 각오나 굳은 결심 때문에 이해가 불충분하다 해도 앞뒤 안 가리고 밀고 나가기도 한다. 따라서 소위 '이심전심'으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때로는 '밀당'하는 가운데 논리적으로 주장하거나 타협하기도 하지만 정서에 호소하여 격정을 쏟아 놓거나 폭발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한번 결심하고 약속한 바를 끝까지 지켜내는 헌신을 통해, 우정 또는 연정의 경계선은 그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점점 더 확장해 나가며 그 가운데서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애환 또는 애증 등의 다양한 색깔로 서로를 알아가고 또 즐거워하면서 우정/연정을 나누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관계의 기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라 하지 않는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는 이처럼 지적인 요소와 정서적인 요소 또 의지적인 요소가 실타래처럼 서로 얽혀 있는 삼겹줄과 같아서, 어느 것이 먼저이며 어떤 것이 나중인지 분리시킬 수가 없으며, 반대로 이 세 요소가 고루 고루 균형 있게 잘 짜여 있으면 결코 끊어지지 않는 튼실한 관계가 된다. 즉 각각의 인간관계는 그 나름의 고유한 특색을 지니게 마련이기에 객관적인 평가나 비교는 엄밀하게는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우정관계, 건강한 연인관계에 필요한 일반적인 요건 내지 고려해야할 공통적인 요소를 추출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선, 이는 관계의 기본적인 전제 요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우정/연정이란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생각, 곧 좋은 친구 또는 애인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연애의 개념을 어떻게 잡고 있는지,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어떤 밑그림이 어떤지에 따라 그 기대치가 달라지며, 기대치에 따른 결과물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물론 이 밑그림이 처음부터 끝까지 영구불변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가운데 수정 보완되어 가겠지만, 서로의 생각이나 기대치의 차이가 많이 나는 경우 관계가 지속하거나 발전하기란 기대하기가 힘들 것이다. 뻔한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좋은 연애란 연애에 대한 좋은 생각에서부터 출발한다. 그저 환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꿈을 꾸라는 얘기가 아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연인 관계에 대한 나름의 이상적인 연인 상 내지 연애에 대한 기대치와 결혼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은 연애라는 건물의 기초석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는 각자가 준비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연애란 우선은 내 안에서 시작하는 것이며, 이런 면에서 보면 짝사랑도 나름 유익하다 하겠다.

 이 때 무엇보다 유념해야할 관계 구도상의 주요 원리는 '상호의존'이란 개념이 잘 보여주듯이 상호성 내지 호상성의 원리이다. 상호의존 관계는 사실 의존 관계와 확연히 '다른 차원'의 관계이다. 홀로서기가 안된 의존적인 사람은 결코 상호 의존 관계로 들어 갈 수가 없다. 영어로 상호의존 관계를 inter-dependent라고 하지만, 실은 independent가 그 앞에 생략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오해의 여지를 줄일 수 있겠다. 즉 independent [but] inter – dependent 즉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도 충분히 서 있을 수 있지만, 서로가 서로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즐거워하고 찬양하며 또 그러는 가운데 그 아름다움을 더욱 끌어내어 주고 더욱 빛나도록 고양해 주는 관계, 또 반대로 어떤 부분에서 연약함이나 취약점이 있을 경우 서로 참고 기다려 주면서 보완해 주고, 혹 실족하는 경우에도 기꺼이 용납하고 나아가서 손 내밀어서 일으켜 주는 관계여야 한다.

 그래서 연애 방정식 내지 결혼 방정식은 1+1=1로 풀기보다는 1X1=1²으로 정리해 보면 유용하다. 여기서 1²이란 단순한 1이 아니라 '차원'이 달라진 1로서 이제는 선(線)이 아니라 면(面)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상호의존적인 관계란 이처럼 인격과 인격 사이의 사귐이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게끔 고안되어 있다. 아담이 앓았던 상사병은 바로 이런 차원에 대한 결핍이 초래한 그리움과 외로움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홀로서기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예컨대 0.8X0.9=0.72가 되어서 1의 제곱은커녕 혼자 있는 것보다 도리어 더 못한 역-시너지 관계를 보여주지 않는가?!

 물론 실제로 완벽한 1의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안점은 관계 설정을 아예 의존적인 관계로 설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불균형적인 상태로 자기 스스로를 인식하거나 또는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봐 주는 관계 구도로 출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반상(班常)이 뚜렷이 구분되던 가부장적 집단주의 전통이 다져놓은 가치나 관습이 아직도 혼재되어 있는 사회이기에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이런 결혼 방정식은 아마도 상당히 도발적인 것으로 비쳤을 것이다. 지금은 반대로 급격한 개인주의 사회로 전이하면서 여러 가지 반동적인 부작용과 갈등들이 불거져 나오고 있지만, 이런 개체화 내지 개인화 단계는 인간의 인간됨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과제로서, 인간의 가장 성숙한 단계인 상호의존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요불가결한 선결과제라고 하겠다. 물론 상대방에게 이런 기본적인 개념 내지 밑그림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있는지 없는지를 처음부터 확인해 보기란 쉽지 않겠지만, 이런 일대일 관계 구도의 잠재적인 가능성 내지 위험부담율을 반드시 점검한 연후에 본격적인 교제 단계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동시에 1이란 무엇보다도 온전한 자발성 내지 주도성의 상징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누군가의 의지에 쉽사리 편승하거나, 자신의 의지를 번번이 굴복하는 것은 홀로서기가 아직 불충분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반대로 상대방을 억압하거나 조종하려는 경향 역시도 홀로서기의 결여 때문인 경우가 많다. 사랑엔 '거짓이 없으며',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사랑은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것이며, 반대로 사랑은 결단코 강요하거나 억지로 굴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서 선택하고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을 말한다. 완력이나 폭력에 의한 강제나 강요는 사랑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고 참아 주는 사람들 사이라야 비로소 마음에서 우러난 진정한 합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호상성이 가능한, 상호존중의 일대일 관계는 폭력이나 힘으로 밀어붙이는 일방적인 관계로는 언감생심 흉내도 낼 수 없는 차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상호의존 관계는 무엇보다 피차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발성 내지 주도성을 가장 최고의 가치와 기준으로 삼는 관계이며, 그 관계의 울타리 안에서 또 각자가 자신의 자발성 내지 주도성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는 그런 관계이다. 이런 일대일 관계에서 서로의 자발성 내지 주도성이 충돌을 일으킬 때 생겨나는 것이 소위 '밀당'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이런 기초가 확실하다면 이제 두 사람 중 누군가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대체로 연애의 진전 단계를 통성명의 단계 – '그냥 친구' 단계 – '이성 친구' 단계 – '애인' 단계 – (약혼 단계) – 결혼 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을 터인데(사실, 이런 일반적인 진행 단계 내지 과정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고 있으면 불필요한 긴장을 훨씬 줄일 수 있다), 연애의 '손을 내미는' 첫 단추는 이성 친구 단계라 하겠다. 통성명의 단계에서 '그냥 친구' 단계로 접어드는 것 역시 약간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전환이 어려울 수도 있으나, 그 단계는 특별히 이성으로서 대하는 관계라기보다는 동성 간의 우정과 동일한 차원의 호감을 표현하거나 일상적인 도움을 주고받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겠다. 사실 이런 친구는 반드시 한 사람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다양한 사람들을 친구로 삼을수록 금상첨화일 것이다. 또한 이 단계의 친구는 배타적일 필요가 없으며, 혹 이 친구들끼리 서로 서로 알고 지낸다 해도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안전하기도 하고 유익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우정 단계에서는 서로가 배타적인 구속력을 의식하거나 내색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또 해서도 안된다. 사실은 이런 친구 단계를 거치는 동안 서로를 관찰하면서 서로의 취향이나 이성교제에 대한 생각이나 이상적인 이성상 또는 결혼관 등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게 되며, 본격적인 연애 단계인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갖추게 된다고 하겠다.

 소개팅이나 중매의 경우는 이런 예비 단계를 생략한 채 바로 이성 친구 단계 내지 심하게는 곧바로 애인 단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으며, 자칫 가벼운 차원의 소개팅이 반복되다 보면 이성 교제 내지 연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아예 피상적인 것으로 굳어질 수 있다. 더구나 이전에 이성 교제 경험이 전무한 상태로 소개팅이나 중매에 응하게 되면 기껏해야 한 두 차례의 만남을 통해 외모나 스펙에 기반한 첫 인상만 가지고 애인 내지 배우자를 결정하려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소개팅이나 중매의 경우, 연애 경험이 없거나 짧을수록 도리어 시간을 좀 더 여유 있게 두고 기초 우정을 다지도록 해야 한다. 아예 처음 만날 때에 이런 기본 이해를 공유하고, 적어도 한 두 번 만나 보고서 바로 결정하지 말고 어느 정도 충분한 예비적 만남 이후에 본격적인 데이트를 하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남녀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서로를 관찰하고 가볍게 어울릴 수 있는 장(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아마도 학교, 교회, 직장 등의 관계망(네트워크)을 중심으로 이런 가능성을 먼저 타진해 볼 수 있겠다. 사실 배타적인 이성 교제 단계로 바로 들어가게 되면 두 사람은 이미 목표 지향적인 제한된 상황, 곧 데이트 상황에서만 서로 관계하기 때문에 일상적인 상황에서 그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관찰하기가 도리어 어렵게 된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데이트 단계에 접어든 사람들도 이따금씩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객관화해 줄 수 있는 다른 친구들이나 다른 커플들과 만나보는 것이 유익하다 하겠다.

 소개팅이나 중매를 통하지 않고 자연스런 진행 단계를 밟는 경우, '그냥 친구' 사이에서 '이성 친구'(남자 친구; 여자 친구)로 넘어가는 것이 사실상 본격적인 이성 교제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개는 여러 지인들 가운데서 그런 대로 호감/비호감의 구분이 생겨나게 되고, 호감이 가는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본격적으로 데이트를 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길 수 있다. (물론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 소개팅을 병행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만일 그런 대상이 생겨나거나 누군가 나를 그런 대상으로 여기는 상대가 생겨나지 않는 이상 굳이 데이트 단계로 들어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강박관념 때문에 그리한다면, 위험부담만 더욱 커지게 된다.) 이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착수(着手), 곧 소위 대쉬이다. '시작이 반이다'라거나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은 이 상황에서 아주 의미심장하다. 일단 누군가 먼저 제안을 해야, 되든 안 되든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의 제안은 결혼을 결심하기 위한 프러포즈는 아니다. 그것은 약혼 단계에 해당하는 것이며, 지금의 제안은 말하자면 데이트(going-out)를 신청하는 것이다. '그냥 친구'로서 이미 기본 우정이 다져진 사이라면 이런 제안이 크게 이질적인 도약으로는 비치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 어색하지 않을 것이며 위험 부담률도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다. 소개팅이나 중매의 경우에는 제 3자가 이런 제안을 중간에서 대신 해 주는 셈인데, 이 경우에도 몇 번의 만남을 통해 계속 데이트를 해 나갈지 하는 결정은 역시 어느 쪽에서든 먼저 제안해야만 할 것이며, 상대방도 그 제안에 응할지를 두고 역시 결정을 해야 하는 셈이다.

 어쨌든 이런 전환은 거저 되지 않을 것이며, 남자 쪽이든 여자 쪽이든 누군가가 먼저 이성 친구 단계로 전환할 것을 주도적으로 제안해야만 가능하게 될 텐데, 이 때 작용하는 심리적인 부담은 결국 '거절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축약될 수 있다. 동성 간의 우정도 역시 어떤 기점에서는 이런 도약이 필요하겠지만, 이성 간에는 '그냥 친구'에서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로 전환하는 것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로 접어드는 경험이라 하겠다. 데이트 관계로 전환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데에 대한 두려움까지 겹쳐져서,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실로 남녀 관계의 일차 관문인 이 문을 향해 '대쉬'하지 않는 이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은 한편으로 경거망동하는 것을 막아주는 유익이 있긴 하지만, 한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두려움을 무릅쓰고 '거절 받을' 위험부담을 어쨌거나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누군가의 사랑/용납을 받기 위한 선결조건은 일단 용납/사랑해 달라고 하는 싸인을 보내면서 내 마음을 열어 보여야 하는 것이다. 필요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채로 충분조건이 채워지기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연애하자고 손을 내밀지 않는 이상 연애 관계가 저절로 성립되리란 것은 기대할 수 없으며, 피차 눈치만 보고 있다가는 결국 '갑돌이와 갑순이' 꼴이 될 수도 있다. 제안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글로 하거나 말로 하거나, 상징물을 전달하거나 아니면 영상으로 하는 등등 여러 가지 창의적인 수단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그 핵심은 어쨌든 상대방에게 내 의지가 분명히 전달되도록 하는 데에 있다.

 

 셋째로, 데이트 관계가 설정되거나, 데이트 관계로 전환되면 본격적인 이성 교제가 시작되어서 바야흐로 연인 관계(going steady)로 굳혀지기까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소통이다. 사랑이란 결국 두 사람의 인격 사이에 공유하는 부분이 많아질수록 더욱 깊어진다고 할 수 있을 텐데, 데이트 기간 중에 두 사람은 (이제는 '그냥 친구' 관계와는 달리 두 사람만의 배타적인 관계에서) 최대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더 많이 알리고, 또 있는 그대로 더 알아가기 위하여 가능한대로 여러 다양한 상황에서 서로를 노출하고 또 반응할 수 있도록 약간은 의도적으로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늘 같이 밥 먹고 영화 보는 식의 뻔한 순서를 반복하기 보다는 고궁이나 운동장 또는 야외로 나가보거나, 박물관이나 특별 공연 또는 전시회를 둘러보거나, 서로의 친구들과 함께 만나거나, 시사 또는 정치적인 이슈를 놓고 함께 고민을 나눠보거나 현장이나 시설을 함께 방문하거나.. 등등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관심이 있거나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소통이란 기본적으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경계를 침범하지만 않는다면, 의견의 차이나 선호도의 차이 정도는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다. 그야말로 서로 다른 것이지, 누구는 옳고 누구는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만큼' 친밀해지고 흉허물 없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면서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상대방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고 본의 아니게 상대방의 의지에 반하여 그 인격의 역린을 건드리게 된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면 여러 가지로 조짐이 미리 나타나게 되어 있다. 예컨대 목소리의 톤에 힘이 들어가거나, 짜증이 섞이고, 때로는 침묵이나 어색함이 흐르고, 특별한 사유 없이 문자를 씹거나 리턴 콜이 지연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겠다. 상황이나 반응 방식에 따라 싸인은 다양하게 나타나겠지만, 그 핵심 인자는 대동소이한데, 결국 내가 인격적으로 존중받지 않았다거나 나아가서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일어나면서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방어기제 내지 복원/보복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최선의 전략은 역시 솔까말이다. 억압하고 침묵하거나 심지어 잠수를 탐으로써 상대방의 피를 말려보겠다는 전략이나, 아니면 시원하게 되받아치거나 되돌려주기 위한 복수극을 계획해 봤댔자 오해만 증폭하고 상황은 더욱 악화될 뿐이다.

 이런 경우 소통의 간단한 응급처치 기술로 2가지를 염두에 두면 유용할 것이다. 하나는 타임아웃 전략이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점점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하면 처음엔 호미만 있어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나중엔 가래로도 막지 못할 큰 간극이 벌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는 일단 한 쪽에서 타임아웃을 신청하여 일단 가속화 내지 악화를 막아야 한다. 물론 사전에 이 부분에 대한 규칙을 미리 합의 내지 약속해 두어야 한다. 즉 한 쪽에서 타임아웃을 신청하면 상대방은 무조건 그 신청을 받아들여 주기로 하고, 그 대신 타임아웃을 신청한 사람이 다음에 반드시 대화를 재개할 책임을 지는 것으로 해 두면 된다. 오늘만 날이 아니기 때문에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에 다시 차분한 마음으로 대화하면 된다. 감정이 격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는 거두어들일 수 없는, 결국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되는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쏟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나 전달법' 내지 '감정 우선의 전달법'이라고 하는 전략이다.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나아가서 정죄하기 이전에 우선 내게 느껴지는 정서를 상대방에게 일단 알리자는 것이다. "당신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해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내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를 우선 있는 그대로 전달해 보기로 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상대방에게 공이 넘어갔으니만큼 상대방은 뭔가 반응을 하게 마련이며, 비난이나 정죄는 그 반응을 보고 나서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적극적으로 되받아치거나 면박을 주지는 않지만(적극적 공격형), 아예 침묵하거나 소극적으로 반응하는(소극적 공격형) 경우가 많은데 '나 전달법'을 사용하면 이런 양극단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로, 연인 관계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가장 유념해야할 요소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관계의 진도 내지 보조를 서로 맞추어야 한다는 '진리'이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불충분한데 내 자신을 너무 많이 열어젖히면서 다가가거나, 상대방은 상당히 친밀하다고 생각하여 많은 것을 노출하지만, 나는 그만큼 가까이 다가가지 않거나 마음을 열지 않게 되면 관계의 갈등이 자칫 구조화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진도/속도의 차이가 갑자기 벌어지면 소위 친밀감의 정도에 위화감이 생기고 관계의 평형이 깨어지게 된다. 이 때 이런 격차를 빨리 조정하거나 수습하지 못할 경우 관계 자체의 존립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심한 경우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기도 한다. 대개는 밀당을 하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가운데 관계도 점점 깊어지고 친밀감도 자라나게 되지만 이런 밀당이 복원력을 상실할 정도로 갑작스럽거나 급격할 경우에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데이트 단계에서도 서로의 경계를 지켜주면서 한 걸음씩 떼어 놓아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특히 데이트 단계에서 연애 단계로 전환하려는 분기점에서는 아마도 두 사람이 연애의 전체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결정 내지 가장 큰 결심을 해야 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진도/보조가 안 맞아서 타이밍을 맞추지 못할 경우 자칫하면 위화감을 넘어서서 일종의 반작용으로서 혐오감(revulsion)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컨대 이런 관계의 전환에 대해 충분한 상의도 없었는데 갑자기 부모님께 소개하겠다거나, 스킨십을 들이대거나 하는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의 역풍을 맞을 게 뻔하다.

 사실 데이트 단계의 여정을 잘 따라가다 보면, 드디어 '연인' 내지 '애인'의 단계로 자리매김하는 때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대개의 경우 데이트 단계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어느 정도 충분히 알게 되고, 서로 간의 친밀감이 눈에 띄게 증진되었다면, 적절한 시점에서 이제 다음 단계인 연인 단계로 넘어갈 것을 자연스럽게 고려하게 된다. 데이트 관계가 '동사적'인 단계라면, '애인' 관계는 '명사적'인 단계로서,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제 문자 그대로 '애인' 즉 하나의 새로운 신분 내지 새로운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게 되는 단계이다. '데이트 중이야!'에서 '내 애인이야!'로, 호칭으로 하자면  'xx씨!'에서 '자기야!' 내지 'xx야!'로 넘어가는 과정은 처음 데이트 관계를 시작하자는 제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던 목표인 만큼 그리 새삼스러울 것은 없으며, 아마도 데이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자연스럽게 이 목표 지점에 도달할 것이지만, 관계의 양상이나 친밀감의 정도가 이전 단계와는 차원이 달라진다.

 말하자면 이제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다시 무르거나 뒤로 돌아가지 않고, 특별히 이례적이거나 불가항력적인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앞으로 전진할 것을 서로 다짐하는 단계이다. 사랑의 성격으로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에로스가 지배적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아가페가 지배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단계이다. 여전히 이러저러한 일로 밀당이 이따금씩 반복되겠지만 그러나 이 연인관계로 들어서기 전과 후는 두 사람이 관계하는 방식이나 사랑의 성격이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말하자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 곧 방식이나 스타일의 차이가 아니라 구조가 달라지는 단계이다. (사실 밀당의 마지노선을 극한까지 밀어 붙여서 더 이상 밀당을 하지 않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또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드러내기로 서약하는 것, 그것이 곧 결혼 관계인 셈이다.)

 따라서, 이런 전환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얼마나 밀도 있는 사귐과 소통이 필요할지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달라서 일반화할 순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시점에선가 이런 전환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우 이런 전환점이 불확실한 채로 결혼식장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더러 있을 텐데, 그리되면 기본 신뢰 내지 헌신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채 불안정한 출발이 되어서, 마치 다져지지 않은 빈약한 기초 위에 결혼이라는 중후한 건물을 지어 올리는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동안의 데이트는 바로 이 연인 관계라는 울타리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며, 이 울타리 안에 실제로 함께 거할 집을 짓는 것이 바로 결혼인 셈이다. 비유컨대 데이트 신청이 성전 뜰로 들어가는 것이면, 연인이 되기로 결정하는 것은 성소의 문에 해당하고, 결혼은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인 셈이다. 말하자면,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제 퇴로를 차단하고 앞만 보고 나아가기로 하는 단계, 즉 건너가고 나서는 불살라 버리게 될 다리를 이제 건너기로 함께 결심하는 것이 바로 이 연인 관계로의 전환이라고 하겠다. 

이런 결심을 앞두고 망설이고 있는 이들에게는, 지금까지 말한 기본 요소 내지 원리들에 비추어서 그간의 두 사람의 사귐의 여정을 반추해 보노라면 확신을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때로는 결혼에 대한 이해나 밑그림을 두고 좀 더 심도 있게 생각을 정리해 보고, 또 서로의 그림을 함께 맞추어 보는 과정이 더 필요할 수도 있겠다. 대개의 경우 데이트 기간 동안 큰 갈등이나 이질감을 좁혀온 결과로 이 전환점까지 왔을 터, 여기서는 마지막 점검을 위해 몇 가지 소극적인 확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던져 보면서 마음을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의 연인이 되고 장차 반려자가 되는 것에 심각한 장애물이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 사람이 내 애인이 되고 장차 반려자가 되는 것에 심각한 장애물이 남아 있는가?'

 이런 연인 관계로의 결단과 헌신은 이미 두 사람이 소통 방식을 포함한 여러 면에서 코드를 많이 맞춰왔기에 딱히 누가 먼저 주도하거나 대쉬할 필요조차 없을지 모르며, 또 맨 처음 데이트를 신청할 때만큼 위험부담도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두 사람의 관계가 이제는 결혼 관계 쪽으로 나아가기로 기울어지고 또 기대하는 단계라는 점에서 다른 어떤 단계보다도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심해야 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 연인 단계에 들어가야 비로소 훨씬 더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생각이나 정서, 가치관 그리고 어린 시절의 성장 배경과 자아 형성의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 현재 하고 있는 일이나 장래의 꿈이나 계획 등등 인생의 여정들을, 거절받을 것에 대한 부담이나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깊이 있게 나눌 수 있고, 나아가서 두 사람이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결혼 관계로 들어갈 경우, 앞으로 두 사람에게 전개될 미래를 함께 그려보기도 하고 구체적인 계획까지는 아니더라도 각자가 소망하는 바나 꿈꾸는 바를 서로 맞추어 볼 수 있는 울타리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이트 단계에서 연인 단계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일종의 배타적인 헌신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에게서 이런 헌신을 충분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아직 결혼을 확약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두 사람이 이제 서로를 동반자로 받아들일 각오를 하는 단계가 바로 이 연인 단계로서, 사실 이 단계에서 비로소 두 사람의 인격과 인격이 서로를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차원으로 접어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외적인 조건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 서로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또 서로의 인격을 상대방에게 내어주기로 선택하는 관계를 언약적 또는 은혜적 관계라고 하는 것이며, 그런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결혼은 바로 이 언약적 사랑으로 둘이 하나로 결속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 언약적 사랑은 앞에서 언급한 바, '존재' 이외에 '소유'에 해당하는 그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고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다. 소유(조건이나 스펙) 없음을 빌미로 존재를 부끄럽게 하거나 내치는 관계는 언약이 아니라 계약이다. 이런 언약적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식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압력이나 속박이 없이 우리의 존재 그대로를 발현할 수 있게 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는 '용기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이리되면 '미움 받을 용기'마저도 필요 없다. 왜냐하면 관계 구도 자체가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마치 존재론적으로 두 사람이 본래 하나였던 것처럼, 이제 그 어떤 조건도 둘 사이를 이간하지 못하는 그런 연합과 결속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하는 단계이다. 연인 관계란 바로 이런 관계이며, 애인이란 이런 대상이다.

 이런 연인 관계에서 깊이 있는 나눔과 친밀감이 더욱 농익게 되면, 이제 정식으로 청혼(프러포즈)을 하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른다. 약혼식을 하던 하지 않던, 이 단계를 약혼 단계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이제부터는 구체적으로 결혼에 대한 그림을 그려 나가야 한다. 말하자면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우리' 호(號)를 진수하기 위한 실제적인 준비를 하는 단계이다. 장단기적인 소명과 직업, 시댁/친정 식구들(in-laws) 관계, 교회 관계 등등, '나'의 아이덴티티를 '우리'의 아이덴티티로 어떻게 변환시켜 나갈지, 또 '각자'의 네트워크를 '함께'의 네트워크로 어떻게 전환시켜나갈 것인지, 나아가서 주거 지역 선정, 결혼 일정, 혼수 등등 실제적인 준비를 하는 기간이 약혼 기간이라 하겠다. 특별히 우리 문화에서는, 결혼은 나와 너의 결합일 뿐 아니라 두 가정의 결합이기에 자칫하면 서로 간의 문화나 가치관의 차이로 심각한 갈등의 지뢰를 밟을 수도 있음을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마도 그 동안 축적한 '낭만적인 정서'를 다 고갈시킬 정도로 긴장해야 하는 단계일지도 모른다.

 

 다섯째로, '스킨십'의 문제는 데이트 단계에서부터 서서히 대두되게 마련인데, 특히 연인 단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대두될 것이다. 또 결혼식이 임박한 시점에서는 성적인 연합을 위한 실제적인 준비를 해 두어야 하는데, 아마도 연애의 함정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진도를 맞추지 못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스킨십 문제이다.

 스킨십이 섹스와 동의어가 (결코) 아님을 전제로 한다면, 스킨십을 두려워할 이유는 결코 없다고 본다. 마치 우리가 마음을 나누듯이 몸을 나누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문제는 간단히 정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음을 나눌 때에 그것을 직접 나누지 못하기 때문에 말로 하거나 글로 하거나 하듯이, 몸을 나누는 것도 반드시 신체를 직접 만지지 않고도 얼마든지 동일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성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신체 부위를 제외한다면 우리 몸도 얼마든지 소통의 수단 내지 통로로 활용할 수 있다. 굳이 민감한 신체부위를 직접적으로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예컨대 손을 잡고 다니거나 가벼운 포옹 또는 어깨동무만으로도 마음의 표현은 충분하며, 굳이 입술에 키스하지 않고 손등이나 이마에 키스하는 것으로도 애정의 표현은 충분하다. 심지어 모자나 옷깃, 장신구 등을 쓰다듬는 상징적인 행위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은 전달되게 마련이다.

 여기서, 두 가지 종류의 스킨십을 구분해 보는 것은 시의적절하고도 유익하며 또 유용하다. 성기적(genital) 스킨십이 성교에 들어가기 전 예비단계로서의 애무와 동일한 것이라면, 비성기적(non-genital) 스킨십은 성교와 무관하게 서로의 좋아하는 마음, 사랑하기로 한 결심을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섹스가 몸으로 하는 결혼서약(식)을 상징하는 메타포라면, 성교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 작업인 성적 스킨십은 첫날밤까지 기다리는 것이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도 지선이자 최선이다. 따라서 결혼이 임박한 약혼 단계의 커플을 제외한다면, 아무리 가벼운 자극이라 할지라도, 굳이 성적 스킨십을 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이며, 우리의 생리/생식 기제상 잘못 건드리면 통제 불능이 되기 때문에 성적 스킨십은 일부러라도 도리어 조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자칫하여 틈을 주게 되면, 혼전 섹스 내지 혼외 섹스에서 발생하는 각종 부작용들에 따르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됨은 물론, 수치와 죄책감 등이 어우러져서 두 사람의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곤두박질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결혼을 바로 앞둔 사이라 해도 첫날밤에 함께 축하할 것만큼은 (따로) 남겨 두어야 한다.

 사실 성적 스킨십이 두 사람의 친밀감을 강화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약화시킨다는 통계 결과는 스킨십의 의미와 가치를 여실히 드러내어 준다고 하겠다. 섹스는 일종의 메타포로서 그것이 유비하는바, 곧 두 사람 사이의 언약적 사랑의 틀거리(결혼 관계)와 내용(헌신)이 있을 때에, 그것을 친밀감이라는 정서로 표현하고 소통하는 수단 내지 통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내용도 없는데 신체적인 자극을 통해 쾌감을 주고 받는다고 해서 그 내용물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섹스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있는 욕구는 바로 이런 연인 관계, 곧 친밀한 연합과 결속에 대한 갈망이 아니던가?!

 따라서 우리는 섹스가 아니라 사랑을 먼저 생각해야 하며, 사랑을 넘어서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내 생애 전체를 걸고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 나를 또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 그 한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연애이며, 그 한 사람이 바로 연인이자 애인이다. 이런 연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섹스가 일상화되어 버린, '참을 수 없이 가벼워진'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쩌면 섹스를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하며 소비주의의 시궁창에서 건져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나치게 배타적인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결혼 관계까지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결혼 관계를 우리 각자의 가족을 넘어서서 훨씬 더 넓은 이웃과 사회 그리고 나아가서 인류 공동체 전체의 맥락에서 우리가 어떻게 사람들을 사랑하고 관계 맺어야할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메타포로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청년 사역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이런 주제를 훈련 커리에 반영하여 정기적으로 가르쳤으면 한다. 연애와 섹스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을 정립하지 않은 채 뒷북치듯이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는 치유적 접근보다는 예방적인 접근을 통해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에너지도 절약하고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안전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대로 된 성교육이나 이성교제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이 전무하거나 혼란스러운 현 상황에서는 교회(청년부)의 역할은 그만큼 더 지대하고 막중하다 하겠다. 이성 간의 우정과 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하고, 이성교제와 스킨십에 대해서 밑그림을 그려 주도록/나가도록 하라. 그리고 동시에 이런 이성 간의 우정과 연정의 기회를 할 수 있는 대로 활용토록 장려하고 또 격려하라. 다만 성기적 스킨십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이 혼돈한 시대가 워낙 유혹의 올무를 거미줄처럼 쳐 놓고 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그리고 열린 토론을 통해 교육하고 교정해 나가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청년 사역의 부르심에는 무엇보다 이같은 '연애사정관'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권영석(전 학원복음화협의회 상임대표) / 송경숙(카운셀러)

"회복에 대한 예후가 불확실한 이 땅에서 어느새 6학년에 들어섰지만, 복음의 은혜와 그 핵심 가치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가 되어, 명멸하는 이 땅의 교회를 정화하고 어둠에 잠김 이 겨레에 희망의 새벽을 깨우는 것을 보고픈 열망은 아직 잠재울 수 없어서 때늦은 홍역을 치르는 아이처럼 조급한 마음만 더욱 다그치는 중"


youngseokwo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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