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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특집 5] 만날 때가 있으면, 헤어질 때도 있다 _ 권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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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복협 작성일16-05-30 11:37 조회1,5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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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된 시공간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별이란 삶의 불가피한 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관계는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공리를 거스르지 못한다. '만남은 이별의 시작이다'라는 일본식 표현은 어감이 훨씬 섬뜩하긴 하지만, 논리는 매한가지다. 다만, 결혼 관계와 혈연관계가 예외라면 예외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요즈음은 이마저도 이런 공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상처와 슬픔이 난무하는 트라우마 세상에서 씁쓸함을 달래기가 더욱 어려워진 것도 현실이지만, '검은 머리 파뿌리될 때까지 한평생 곁에 있겠다'고 하는 결혼 서약은 여전히 인간들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형상화해 주는 가장 자연스러운 이미지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결혼을 향해 진전해 나가다가 결혼의 문 앞에서 돌아서게 되는 경우다. 처음부터 돌아서게 될 것을 예상하거나 기대하고 데이트를 시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이 황당한 일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결혼의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는 그 허탈함과 상한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 내지 보상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상처와 슬픔을 딛고 사태 수습을 용이하게 하려면 역시 벌어진 상황을 복기하며 해석할 수 있는 나름의 틀이 있어야 한다.

 "어째서 어떤 데이트는 결혼으로 나아가는데 비해, 어떤 데이트는 작별로 귀결되고 마는 걸까?" 앞서 일반론("청년 사역자/리더를 위한 '이성교제' 가이드라인" 1편, 2편)에서 언급한 데이트 진행 과정상의 단계에 비춰보자면 이 질문은, "데이트 단계연인 단계는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이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넘어야 할 장애물은 어떤 걸까?"로 좁혀질 수 있겠다. 만일 우리가 이 두 단계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를 알고, 전환을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을 미리 안다면, 작별 쪽이 아니라 결혼 쪽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열쇠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며, 또 반대로 아무리 해도 그 열쇠가 만들어지지 않을 경우, 결혼 문전까지 다 가서야 비로소 '이건 아닌데' 하고 돌아서는 낭패감을 사전에 예방하고 에너지 낭비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결혼의 밑그림을 먼저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결혼하면 데이트할 때와는 무엇이 달라지는 걸까?" 그리고 "무엇이 데이트에서 결혼으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걸까?"라는 총체적인 프레임을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목적지를 분명히 알 때라야 여정을 제대로 짤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의 열쇠(關鍵: 관계의 열쇠/자물쇠)는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싱거울 정도로 단순하고 소박하다 하겠다. 그 열쇠란 바로 두 사람이 결혼 관계로 들어가기로 다짐하고 약속하는 것이다. 곧 '영원한' 연합 관계로 들어가기로 하고, 또 들어간 다음에는 '죽음이 갈라 놓기 전에는' 그 '굴레'를 [적어도 먼저는] 깨지 않고 그 안에 끝까지 머물러 있겠노라고 하는 두 사람의 의지가 결혼 관계를 유지시키는 최종 보루인 셈이다. 그리고 이 의지를 다짐과 맹서로 천명하는 것이 곧 결혼서약식인 셈이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약속을 깨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다짐을 굳게 하기 위해, 모든 지인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여러 증인들 앞과 하나님 앞에서', 성찬식을 '곁들여', 예배하고 기도로 확증하며 인증하는 예식이 바로 결혼식인 거다.

 이렇게 보면, 결혼 관계야말로 살얼음판처럼 취약하기 짝이 없는 게 아닌가 싶다. 우리의 의지란 게 무한정 강인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세상, 수시로 말을 바꾸고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을 때리면서 실리를 좇아 이합집산하는 세상, '한탕'만 가능하다면 언제든 안면몰수를 감행하는 이런 열악한 세상에서는 초심을 잃지 않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내기란 결코 쉽지 않지 않은가?

 그러나 곰곰 생각해 보면, 사실 우리의 의지보다 더 강력한 것이 또 있을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굴하지 않는 순교 정신도 의지의 산물이며, '몸은 빼앗겨도 마음은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역시 의지 덕분이다. 사랑은 무엇보다 마음의 문제요, 의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랑을 저버리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의지를 저버리는 것이며, 자신의 마음에 반하기로 마음을 먹는 것이므로 자아 안에서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1)

 다시 말하면, 만일 결혼이 본인들의 의지와 무관한 (즉 의지보다 못한) 어떤 다른 요소나 조건에 달려 있게 되면, 이야말로 사실 더욱 큰 일이 아닐 수 없으니, 결혼 관계는 더더욱 취약하게 되기 때문이다. 결혼 조건이 많으면 많을수록 결혼 관계가 도리어 쉬 흔들리게 되고 심지어 쉬 깨지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반대로 관계의 결렬로 인한 상처가 더 깊고 예리하게 남게 되는 것 역시 서로의 마음과 의지가 더 깊게 연루되었을 때이다.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었는데 멀어져 간 사람'2)은, 그저 필요와 조건에 따라 만나던 사이거나, 오다가다 만난 사이인데 어느 날 보이지 않게 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조건 때문에 만났던 사이의 이별이라면 그저 아쉬울 뿐이겠지만, 조건과 상관없이 순정으로 사랑하고자 했던 사이의 작별이기에 상실에 따르는 아픔과 슬픔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연인들을 참담하고 울적하게 만드는 게 아니겠는가? 비유컨대, 서로의 자아 경계선을 얼마큼은 허물어 내고 상대방에게 자신을 내어주고 또 상대방의 자아를 얼마큼은 받아들였기에, 그것이 빠져나간 자리만큼 자아가 함몰되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을 주기로 의지를 정하는 것은 인격 전체가 연루되어야 하는 문제요, 존재 자체를 개입시키는 문제이다. 에리히 프롬의 개념을 차용하자면, 이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내가 소유한 것의 일부를 주었다가 떼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 곧 나의 존재를 주었다가 거절당하고 배신당하는 경험인 셈이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 바친 순정'이 '모질게도 짓밟히는 경험'3)은 가히 죽음(목숨)에 방불한 고통의 대가를 수반한단 말이다. 관계의 종말은 일종의 사망 선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만남이 데이트 단계를 넘어 연인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 전환기에서 두 사람은 관계를 진전시킬지 말지를 신중하게 생각하고 의지적으로 결정해야만 한다. 데이트 상대인 이성 친구가 아니라 이제는 애인으로, 또 평생의 동반자로 상대방의 인격을 받아들이고 또 내 자신의 인격을 내어줄 수 있을 것인지를 충분히 고려하여 연인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데이트에서 결혼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이 결정이야말로 사실상 두 사람의 남은 인생 전체를 규정짓는 가장 심대하고 중대한 선택이 될 것이다(물론 결혼식을 앞두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다짐하고 각오하면서 마지막 해자(垓字)를 건너게 되겠지만 말이다).

 사노라면 매사가 생각대로만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도 역시 피조물이라고 하는 태생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어서 전지전능한 상태에서 매사를 선택하고 결정하지는 못한다. 모든 경우의 수를 깡그리 다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우리의 의지를 변개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작심한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은 사람된 자의 책임이자 도리인 셈이며, 사실 그것이 우리가 지닌 가장 위대한 힘이기도 한 것이다. 결혼이란 이런 원초적인 신뢰와 헌신에 바탕을 둔 약속에 다름 아니며,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가야 어른이 된다는 옛말은 아마도 결혼 관계란 마치 인간[이 되었음]을 입증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는 의미를 전달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모든 인간 관계가 다 그렇듯이, 데이트 관계 역시 계속 성장할 수도 있고, 아니면 성장이 멈춘 채 점점 마르다가, 마침내 고사할 수도 있다. 결혼이란 울타리 바깥의 세상과 결혼 울타리 안쪽의 세상은 차원이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결혼이란 일종의 '넘사벽'으로서 그 안에 들어가면 공기부터가 전혀 다르다. 그 문 안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 뒷걸음칠 수 없도록 일단 결혼의 문이 닫히면 건너온 해자의 다리는 불살라지고 말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이제부터는 소위 "한 몸"으로 결합하는 것이며 이제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 문 앞에서 들어가지 않고 망설이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돌아갈 다리가 남아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면 결혼의 관문을 들어서기 전에는 아직 시간이 있는 셈이므로, 혹 관계를 더 진전시키지 않기로 결정하게 된다 해도, 그간의 정리를 생각하면 마음은 서운하고 안타깝지만, 도리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이 데이트를 시작했다가 중도에서 하차하는 경우, 그 헤어지는 시점에 따라 그 색깔이나 온도도 각각 천차만별이겠지만, 이 글에서는 "데이트 단계"에서 "연인 단계"로 들어설 찰나에서 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키지 않고 아쉽지만 작별하기로 하는 경우와, "연인 단계"로 들어서기로 했지만 어떤 연유에서건 더 이상 진전이 없는 채 권태기로 빠졌다가 헤어지게 되는 두 경우를 중심으로 '헤어지는 데이트'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연인 단계"라 하면 앞 글에서 설명했듯이,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결혼까지 갈 것을 전제로 하는 교제 기간으로서 '애인' 또는 '연인'이란 호칭이 시사하듯이 상대방을 나의 자아 정체성의 경계 안으로 들어오도록 마음/인격의 문을 열고 상대방의 인격/마음을 받아들이는 단계라 하겠다).

 우리 문화에서 "데이트"란 개념은, 이제는 더 이상 터부는 아니지만, 여전히 뭔가 낯설고 어색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상대방을 탐색하고, 사귀어 본다는 것이 왠지 사람을 실험용/실습용으로 간주하는 것 같아 미안스럽고 불편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아마도 유교적/전통적 가치관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이 우리의 DNA 안에 살아남은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실은 더욱 신중하게 접근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나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할 것이다. 마음에 받아들일 준비나 각오가 아직이라면, 관계를 더 이상 진전시켜서는 안된다.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는 명언은 이성교제에도 아주 유효하다. 이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상대방을 위해서도 당연히 그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나는 데이트 기간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것이 실제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아주 유용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데이트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을 제 1 전환기라고 한다면, 데이트 신청을 하여 '이성 친구'(여자 친구, 또는 남자 친구)의 자격으로 어느 정도의 충분한 교제 기간이 지나갈 쯤, 이제 본격적으로 애인 또는 연인의 자격으로 진전시킬지 말지를 결정[해야]할 때가 온다. 이 '결정의 시점'(결단의 순간)이 말하자면 제 2 전환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인격의 외피만이 아니라 이제 인격의 내피를 열고 서로를 내어주고 받아들이는 단계로 들어가기로 함께 결단하자는 것이다. 외피에서 내피로 접어드는 이 전환기에서 결정의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어정쩡함의 늪에 빠지게 되어 앞으로도 뒤로도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4)

 제 1 전환기에서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혹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면, 제 2 전환기에서는 데이트 중단을 화두로 꺼냈다가 거절감을 주게 되면 어쩌나 하는 미안함과 혹 거절의 상처에 대해 분노하고 보복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넘어서야 할 장애물인 셈이다. 제 1 전환기를 넘지 못하고 우정 단계를 오래 끌 경우 "애매한 친밀함"5)의 늪에 빠지게 된다면, 제 2 전환기를 넘지 못하고 데이트 단계에 머무르게 되면 어정쩡한 소원함의 늪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대개 데이트를 시작했다 하면 바로 결혼까지 갈 것으로 전제하고 시작하거나 또 상대방이나 주변에서도 그것을 기대하는, 일종의 원-스톱 데이트 시스템에 익숙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데이트를 가볍게 시작하지도 못하게 되고, 또 어쩌다가 데이트를 시작했다 하면 바로 결혼까지 가야만 하는 부담감에 사로잡혀서 분별력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채로 결혼의 턱밑까지 갔다가 뒤늦게 고무신을 돌려 신음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기거나, 심지어 결혼 관계로 들어갔다가 비로소 '실수'를 자각하게 되지만 때는 이미 늦어서 돌이키기엔 너무 멀리 온 경우를 흔히 보게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만일 우리가 중간 과정에서 거름 장치를 설정해 두기로 피차가 합의하거나 인식을 같이 해 둔다면, 다음 단계로 진전하기로 결정하더라도 두 사람이 서로의 의지를 확인하고 진전할 수 있을 것이며, 다음 단계로 진전하지 않기로 하는 경우에도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간 다음에 주고 받게 될 깊은 상처들을 미연에 차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렇게 볼 때, 동사형(주로 활동을 함께 하는 관계, going-out)의 데이트 관계에서 명사형(신분이나 지위도 함께 공유하는 관계, going-steady)의 애인 관계로 넘어가는 지점에다가 일종의 전환점을 설정해 두는 것은 일석이조처럼 유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으로 불필요한 상처를 줄일 수 있고, 다른 한편 두 사람의 관계를 든든한 의지적/자발적 헌신의 기초 위에 세우기 위한 정지 작업이 가능하게 된다고 하겠다. 장차 들어갈 결혼의 약속은 실로 엄청난 헌신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약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혼이 그만큼 매혹적이고 복된 까닭은 사실 그 뒷면/밑면에 그만큼 엄청난 아가페의 헌신과 책임을 수반하는 사랑의 기반 위에서 출범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던가?

 물론 두 사람이 결혼까지도 내다보고 서로의 마음과 의지를 주고받기로 결정하여 "애인 관계"로 들어갔다 해도, 애초에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일이지만, 한 쪽에서 그 '마음'을 지키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나 적어도 상대방의 그 [순수한] 마음을 확인했던 만큼, 역설적이게도, 상실을 극복하는 것이 더 쉬워질 수 있다고 본다. 상대의 마음을 확인도 못했는데(상대방도 내 마음 같으려니 생각하고),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모든 걸 다 내어주고 진도를 뺐다가 거절당하는 경우엔 상황을 수습하고 마음을 추스르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맨붕 상태에 빠지는 것은 대개 그 바닥을 알 수 없을 때이다. 한 없이 추락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간 지점의 그물 하나는 쳐 두어야 한다. 복기를 하더라도 그 지점까지만 할 수 있도록 해야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원점으로 돌아가서 복기하려면 그만큼 에너지가 더 들게 마련이며, 온갖 망상과 불신과 오해로 소설을 쓰게 되면 때로는 복기가 아예 불가능하게 되어서 오랜 세월을 멍 때리며 보내야 할 것이다.]

 우선 연인 관계로 전환할지 말지를 앞둔 시점에서 부정적인 결정을 내리게 되는 경우를 보자. 데이트 단계에 들어와서 이러저러한 의견차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한 갈등을 수차 겪었을 것이며, 정서적인 밀당도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소통에도 별 긴장이 없게 되었다면, 두 사람은 이제 전환기(제 2 전환기)에 들어와 있다고 하겠다. 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한 특별한 난관이라 할 만한 또 다른 장애 요인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 전환기를 지나면서 양가 부모에게 소개를 하는 기회를 엿보든가 하면서 연인 관계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두 사람의 관계에서 친밀함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정체하게 만드는 분명한 장애 요인이 있거나 아니면 왠지 모르게 정서적인 권태기가 오래 간다면, 이 전환기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두 사람은 진지하고도 냉철하게 이 문제를 도마 위에 올려야 한다.

 이 때 한 쪽에서 미리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로 문제 제기를 하게 되면, 상대방도 동일한 결론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 이상 상처가 증폭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사실은 이는 혼자서 결론을 미리 내릴 정도로 이미 충분히 묵힌 이후에 문제 제기를 하게 되었다는 반증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앞둔 시점에서는 소통의 일반 원칙인 '진리'와 '사랑' 사이의 균형이야말로 세심하고도 지나치다하리만큼 섬세하게 준수되어야 한다. 솔까말로 정직(진리)의 원칙을 대변한다면, 자기중심적으로 일방적인 결정을 내리지 않겠다고 하는 성실(사랑)한 태도로 그리할 수 있어야 한다. [실은 정직할 수 있을 때에 상대방을 존중할 여지(자유함)가 생기며, 반대로 상대방을 존중할 때에 정직할 수 있는 여지(담대함)가 도리어 확보될 수 있다.]

 이런 조정기는 아마도 그동안의 교제 기간 가운데 겪었던 어떤 갈등보다도 더 힘겨운 갈등의 시간일 수 있을 것이다. 갈등을 해소하고 난관이 되는 요소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게 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하고 데이트를 마무리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해도, 두 사람이 객관적으로 서로의 상황이나 서로의 마음을 파악하고 헤아리는 가운데 합의에 이르게 된다면 이 또한 두 사람을 위해서 최선을 찾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였던 셈이니, 이러나저러나 이런 문제제기는 두려워하거나 피할 이유가 없다. 데이트의 목표가 결혼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데이트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실 그보다 더 폭넓은 것('성숙', '행복', '충만' 등으로 표시해 볼 수 있는)임을 상기하는 것이 이 지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상대방이 내 결혼 상대로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갑자기 그 사람이 무용지물, 그야말로 '꽝'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사람은 여전히 귀하다 못해 고유한 하나님의 형상이자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인격체이며, 혹여 함께 데이트하며 인간에 대해서나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이 자라고 인식의 지평이 더 넓어졌다면 그만큼은 나도 기여를 한 것이며, 그 사람도 나의 성숙에 도움을 준 것이지 않겠는가? 사실 사랑이 별것이던가? 비록 지금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느껴지지만, 그 동안 우리는 원수까지는 아니었지만 귀한 이웃을 사랑하여 보았던 소중한 경험을 한 셈이며, 한 사람의 인격과 그 내면을 볼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을 보냈던 셈이 아니던가? 한 자락 추억이나 깨달음으로 남겨서 간직할 수 있다면 그 역시 우리 인생의 더 없이 특별하고 소중한 자산이 아니겠는가?

 해서 이런 소중한 만남, 특별한 사람을 아프게 하면서 데이트를 마무리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데이트 신청을 하고 그 신청을 받아들일 때의 그 설렘을 기억한다면, 데이트를 마무리할 때는 적어도 그 설렘의 대상이 되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작별할 수 있어야 지난 세월 함께 나누었던 우정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갈무리될 수 있을 것이며, 사실 이런 헤어짐은 다시 또 다른 설렘을 만나는 데에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작용할 것이다.
 
 다음으로, 일단 '연인 관계'로 진전시킨 연후에 이처럼 예기치 않았던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 힘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실, 앞에서 언급한 전환기를 넘어서기 전에 이런 장벽들을 현실적으로 충분히 고려하여 연인 단계로 들어왔다면, 그야말로 결혼 단계까지 주욱 갈(going steady) 수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전환기의 돌다리를 심각하게 두드러지지 않은 채 건너뛰게 되었을 경우에 뒤늦게 다시 돌아가려 할 경우 상황이 더 어렵게 되며 상처도 불가불 더 깊어지게 된다고 본다. 이런 경우에 최선책/차선책은 무엇이겠는가?

 우선 내가 원인제공자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상대방이 불가피한 어떤 이유로 헤어질 것을 제안해 오는 경우(소위 '차이는'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만일 상대방의 결심이 유동적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원리들을 참조하여 대화와 조정의 기회를 할 수 있는 대로 만들기 위해 애써야겠지만, 상대의 결심이 이미 확고하고 또 돌파의 가능성이 안 보인다면 더 이상 미련을 두어선 안 된다. 사랑이란 마음과 의지에 반해서 다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몸은 붙잡아도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구걸과 연민이 되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사랑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짝사랑이 아닌 참사랑은 쌍방적인 것이기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그야말로 '사랑하기에 보내야' 할 때가 있으며, 보내 주는 것이 사랑일 때가 있는 것이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시는 길에 뿌리는' 정도는 아니어도 '말없이' 쿨하게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소유하는 것이기보다는 내어주는 것이며, 적어도 공유하는 것이니만치 두 사람이 함께 했던 추억의 한 자락이라도 건지기 위해서는, 만남이 그러했듯이 헤어짐 역시도 반드시 고상해야만 한다. 물론 한 두 차례 재고를 요청하고 대답을 기다리는 시도는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 정도는 시간을 벌어야 정말 다른 돌파구가 없을지 최종적으로 확인/확신할 수 있고 또 내 편에서도 마음 정리를 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이제 반대로 내가 주도하여 관계를 정리하는 입장에 서는 경우(소위 '차야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전환기의 돌다리를 충분히 두드려 보고 "연인 단계"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면, 지금 그 지점으로 돌아가서 그 단계에서 짚고 확인해야 할 것들을 한번 정리하고/털고 새로 시작하도록 하자고 제안할 수 있을 것이며, 순서/진도가 뒤바뀌긴 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뒤늦은 복기 작업을 진지하게 시도해 보라. 그러나 만일 전환기에서 다짐과 각오를 다졌음에도 다시 재고를 위해 진도를 뒤로 물려야겠다는 확신이 있는 경우, 먼저 정중한 사과가 전제되어야 한다.6) 충분한 사과가 없는 채로 '재심'을 요구하게 되면, 이는 예의에도 벗어나지만, 추후 두 사람의 신뢰 관계를 다시 쌓아 올리는 데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잠수를 타거나 문자메시지 몇 줄 띡 보내는 것으로 관계를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발상 자체가 바로 그 동안의 관계의 성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확실한 반증으로 각인되고 말 것이다. 이런 일은 데이트 상대에게는 고사하고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무례하고 천박한 행동이다.

 아무리 디지털이 삶의 편의를 제공한다고는 하지만 인간 사이의 관계 즉 인격적인 사안과 관련하여서는, 여전히 문자보다는 메일, 메일보다는 전화, 전화보다는 대면하여 소통하는 것이 오해도 줄이고, 상처도 줄이며, 시간도 절약하는 방법이다. 수개월 내지 수년 간의 소중한 만남을 그렇게 한방에 날려 버려서는 안 된다. 상대방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게 경박스럽게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 특히 데이트 상황에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무슨 정상회담 하듯이 합리적인 절차를 따라 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대개는 피차가 이미 예민한 상태에서 감지하고 또 끊임없이 서로 사인을 주고받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온도차가 이미 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차이를 쉽사리 줄일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정식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돌파하기로 하든지, 매듭을 짓기로 하든지 맺고 끊는 것을 분명히 해야 애꿎은 시간도 절약하고 불필요한 밀당으로 말미암는 에너지 낭비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데이트 관계가 다 결혼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어차피 우리가 [서로에게] 최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었던, 아니 만나야 했던 것이라면, 서로 고마워하며 또 서로 축복하며 만남을 정리할 수 있으며, 또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지금 수퍼마켓에서 남자 또는 여자라는 상품을 고르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게 딱 맞는 사람이 아니어도, 누군가에게는 딱 맞는 소중한 사람일 수 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그를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신가? 헤어짐이 데이트 과정의 중요한 한 부분이기에, 이 다음의 데이트를 준비하는 차원에서도, 아름다운 작별이 되도록 해야 한다. 잘 헤어질 줄 아는 사람이 곧 데이트를 잘 하는 사람이다. "누군가를 사랑했던 당신은 아름답다. 때가 되어 사랑을 보낼 줄도 아는 당신은 더욱 아름답다."7) 이런 아름다운 일을 '자꾸만' 해낼 필요는 없겠지만, 불가불 헤어지기로 하였다면 이 일도 아름답게 해내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사족 1. 헤어진 후 다시 '친구' 단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물론이다. 원래 '친구'로 출발하지 않았던가? 다만 더 이상 데이트 상대는 아니므로 아무래도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서로 인정하고서 그리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큰 의미를 부여하기 힘든 친구로 서로 남게 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으면, 굳이 전화번호마저 삭제하고 마치 스팸메일 대하듯이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족 2. 결혼 생활이 성 생활보다 어마무시할 정도로 훨씬 더 큰 의미와 의의를 지닌 개념이듯이, 데이트는 스킨십보다 어마무시할 정도로 더 큰 개념이다. 섹스는 결혼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며, 스킨십은 데이트 단계의 관계에서는 '사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데이트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은 스킨십말고도 엄청나게 크고 중요한 것이 많이 있다. 과다한 스킨십 문제로 야기하는 갈등으로 말미암아 헤어지는 사람은 부지기수이지만, 사람은 좋은데 스킨십이 [아직] 없다고 해서 헤어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두 사람이 만나서 우여곡절 끝에 일생을 해로(偕老)하는 '한 몸'이라고 하는 복된 관계로 들어가는 것이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여러 복잡다단한 심리적-사회적-경제적-도덕적-영적 조율 과정을 거치는 것임을 생각하면, 섣부른 진도 위반의 불장난으로 마치 물구나무서서 거꾸로 걸어가듯이 관계의 진전을 더디고 취약하게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무엇보다 스킨십 진도는 다 나갔는데, 아직도 데이트 단계에서 "어정쩡한 소원함"의 늪에 빠져 있다면, 이보다 더 난감한 경우가 또 있겠는가?

사족 3. 시집/장가 가는 날에 대한 팁 몇 가지: 1) 머릿속에 너무 많은 것을 신경쓰면 반드시 뭔가를 빠뜨리는 사고가 난다. 가능하면 형제들, 친구들에게 분담시켜라. 2) 주일에 예배 드리고 나서 신혼여행 가겠다고 고집하는 초영적이고 이원론적인 출발을 해서는 안 된다. 3) 피임 방법에 대해 미리 의논하고 콘돔 등은 사전에 챙겨두어야 한다. 4) 가능한 대로 예식 장소를 빨리 벗어나서 둘 만 떨어져 나가도록 하라. 5) 신혼여행은 일반 관광 여행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성적으로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결혼 생활의 로드맵을 그려보는 시간이다. 무리한 일정이나 불편한 여정을 택해서는 안 된다. 6) 결혼식의 꽃은 뭐니뭐니 해도 '혼인 서약'이다. 마음을 담아 준비하고 고백하라. 7) 현장에서 예행 연습을 해 두면 불필요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적어도 식장을 사전에 한번은 함께 둘러보라. 8) 결혼은 신랑 신부의 개인사이면서 동시에 양가의 가족사이기도 하다. 조율할 것들은 식장에 서기 전에 다 끝내도록 하여 양가가 함께 즐거워하고 맘껏 축하하는 자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9) 순서지를 따로 준비하여 신랑 신부도 같이 찬송하고 경청하며 예식에 함께 참여하고 즐거워 할 수 있도록 하라. 10) 첫날밤은 두 사람 만의 은밀한 결혼식이다. 몸의 결합을 통해 마음의 결합을 인치는 서약의 행위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며, 부부가 서로 즐거움으로 연합할 때에 그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임을 꼬옥 기억하며 신랑 신부의 마음과 몸에 새길 수 있도록 하자.

[각주]
1) 여담인데, 강압에 못 이겨서 거짓 자백을 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수치를 안겨주는 법이거늘, 그리고/그래서 법정에서도 고문으로 말미암아 의지에 반하여 한 억지 자백은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다고 하거늘……?
2) 신중현 곡, 유해준 사, <님은 먼 곳에>에서
3) 나화랑 곡, 반야월 사, <무너진 사랑탑>에서
4) 비유컨대, 제 1 전환기는 두 사람 사이의 데이트를 시작할 수 있도록 연결고리를 만드는 작업과 연관된 것이라면, 제 2 전환기는 서로의 자아 안에 상대방이 들어와서 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작업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앞 단계에서는 소위 '호감' 내지 '빠져드는' 정열적인 사랑 곧 에로스가 중심이 되어 아가페 사랑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 과제라고 한다면, 두번째 단계에서는 아가페가 중심이 되어 에로스를 품고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과제가 아닐까? 이런 아가페적인 포용성이 서로의 자아를 있는 그대로 노정할 수 있도록 공간을 확장해 감으로써 두 사람은 서서히 '하나'로 결속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성적인 에너지가 비록 에로스적인 정열에 의해 촉발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메타포적/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잠재적인 에너지일 뿐이며, 아가페 사랑의 문맥이 충분히 준비되기까지는 상징물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거나 도리어 왜곡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5) 이 개념은 김지윤, 『사랑하기 좋은 날』, 포이에마, 2011, p. 166.에서 차용하였다.
6) TV 드라마 《태양의 후예》(KBS)의 명대사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는 당시 둘 사이의 어정쩡한 지점에서 진중한 사과의 중요성과 효과를 잘 부각시켜 주는 명장면이었다.
7) 김지윤, 『사랑하기 좋은 날』, 포이에마, 2011, p. 92.



 


권영석(전 학원복음화협의회 상임대표)
"회복에 대한 예후가 불확실한 이 땅에서 어느새 6학년에 들어섰지만, 복음의 은혜와 그 핵심 가치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가 되어, 명멸하는 이 땅의 교회를 정화하고 어둠에 잠긴 이 겨레에 희망의 새벽을 깨우는 것을 보고픈 열망은 아직 잠재울 수 없어서 때늦은 홍역을 치르는 아이처럼 조급한 마음만 더욱 다그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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