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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특집 6] 결혼의 여정을 떠나는 아들·딸들에게 _ 권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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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복협 작성일16-10-21 14:36 조회88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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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식장에 입장하여 주례자 앞에 서서까지도 ‘최종’ 선서를 할까 말까 망설인다면 코미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어떤 결혼이든 장차 그 결혼이 행복할지 불행할지 100% 장담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가 있을까? 아무리 극심한 분노와 난무하는 욕설로 갈라서는 부부라 해도 처음에는 다 알콩달콩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면서 서로 사랑할 것을 굳게 다짐하지 않았겠는가?


 데이트 기간이 아무리 길었다 할지라도 결혼 안에 들어가 보면, 결혼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생각 밖의 복병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멀리서 산을 바라보면 앞에 보이는 저 산만 넘으면 끝없는 평원이 펼쳐질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앞에 보이는 산을 넘어가면 또 다른 산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과 매한가지라 하겠다. 문제는 어떤 역경이 기다리고 있느냐가 아니라 어떤 태도와 자세로 애환의 여정을 함께 떠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결혼식장을 ‘무사히’ 나서기만 하면 '이제 모든 게 준비가 완료되고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는' 그런 결혼은 없다. 그런 마술 같은 결혼을 꿈꾼다면 아마도 신혼여행 기간조차 넘기기 힘들 것이다. 사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겠다'고 한 그 다짐은 결혼식장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험대 위에 오르는 셈이다. 데이트 기간 중에는 데이트하는 몇 시간만 '참고 견디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이제는 소위 하루 스물네 시간 365일을 거의 '상호성'의 굴레 안에서 지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굴레'는 생각하기에 따라서 굴레가 아니라 사랑의 울타리이자 삶의 활력이 솟아나는 샘(원천)이 될 수도 있기에 서로가 간절히 원하던 바이며 100% 자발적인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순전한 그리고 확고한 자기 의지로 선택했을 때라야 이 굴레 안에서 ‘그나마’ 견뎌낼 수 있다. 결혼 관계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쳐서 그야말로 바닥을 치게 될 때 새로이 시작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에너지의 원천은 결국 자신의 마음이 온전히 담긴 의지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뿐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함께 생각해 보았지만 결혼이라고 하는 '어마무시'한 밀착 관계를 붙잡고 있는 연결 고리는 결국 두 사람의 마음, 곧 마음에서 우러난 의지적 결심인 셈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다 결혼의 수단적인 조건에 불과한 것들이지 결혼의 결정 요인(관건 - 자물쇠와 열쇠)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럴듯한 조건이라 해도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런 저런 조건들이 결혼을 지탱해 주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혼의 열쇠를 여타의 조건들로 대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건강이나 경제적인 능력이나 외모 등의 조건이 '어느 정도'까지는 갖추어져야 하겠지만, 그런 조건들이 결혼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마지막 순간에 그 조건들이 변하거나 아니면 더 좋은 조건들이 나타날 경우 결혼 관계는 풍전등화처럼 취약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결혼이란 그저 이런 저런 삶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결혼 상대란 결코 그런 필요를 충족해 줄 대상으로 격하되어서는 안 된다. 일생의 반려자를 밥 해주고 빨래해 주는 대상, 섹스의 파트너가 되어줄 대상으로 축소시킬 수는 없다. 물론 배우자가 요리도 하고 빨래도 하고 섹스의 상대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저 이런 저런 기능이나 역할을 할 대상을 찾기 위해 굳이 결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결혼이란, 에리히 프롬의 용어로 하자면, 뭔가 내 욕구를 충족시키고 만족을 줄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를 좌우할 대상 곧 내 존재의 절반을 채워줄 대상을 만나는 것이며, 그 '존재'를 내 인격 안으로 소중하게 받아들여서 그와 더불어 온전한 나/우리를 형성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그 존재와 더불어 살면서, 또는 새로운 존재인 '우리'로 살면서 삶을 함께 공유하고 향유해 나가는 것이 결혼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결혼 서약이란 결혼 생활로 들어가는 출발점이며 결혼식을 통과한 이들은 이제 그 서약을 실천하고 결혼 생활을 시작할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결혼식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현대인들이 워낙 매사를 소유와 성취로 이해하는 고질적인 환원주의에 길들여진 나머지 데이트도 연애도 뭔가 성취하거나 소유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지만, 인격 내지 인격적인 관계란 소유나 성취로 환원하려 하면 할수록 피상적이 되거나 왜곡되기 쉬운 법이다. 결혼식을 올리고 이제 내 아내/남편이 되었으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미모의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고 해서 결혼 생활이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며, 재벌 2세를 남편으로 둔다고 일생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인격 간의 관계란 그런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랑의 물을 주고, 돌멩이들을 걸러내고, 여우들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나 쉽사리 황폐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인격이요 ‘인격적’ 관계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 현대인들은 결혼 ‘생활’에 들어가는 비용은 별로 감안하지 않은 채 결혼하고 싶어 하고, 또 결혼식만 '잘' 치르면 마치 결혼 생활이 절로 보장될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결혼식이란 결혼 생활로 들어가기 위함이며, 결혼 서약이란 결혼 생활을 해 나가기 위함이다. 사랑은 일회적인 이벤트가 아니라 끊임없이 물과 거름을 주면서 함께 가꾸고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 이벤트 중심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성취와 소유의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한다. 결혼마저도 이런 식으로 재단하게 되면서 현대 사회의 결혼 관념은 심하게 삐뚤어지고 천박해지고 말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결혼식을 쌈박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결혼을 결혼답게 유지하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일구어 갈 수 있을까?

 사실 데이트 기간을 충분히 잘 견뎌내고 서로 간의 우정을 잘 다져온 커플이라면 결혼 생활 역시 잘 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떻게 쌓아온 날들이었는데,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결혼식이었는데……. 이제부터 진짜 사랑을 제대로 해 볼 참이 아니었던가?! 데이트가 연습이었다면, 결혼은 실전인 셈이 아니던가? 데이트처럼만 해도, 그동안 연습한 만큼만이나마 실전에서 실력 발휘를 할 수 있어도 이토록 빈궁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데이트를 잘 해 왔던 커플들에게 결혼 ‘생활’은 사실 그다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닐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실상을 보자면, 많은 부부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오던 그 시점이 결혼생활을 통틀어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결혼의’ 추억이었노라 고백한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일종의 서곡과 마찬가지인데, 그 이후 본격적인 악장으로 넘어가서는 서곡에도 못 미치는 밋밋한 결혼 생활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이처럼 용두사미로 끝나는 데이트와 결혼 관계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하겠지만, 대부분 데이트 시절에 소중하게 지니고 있던 그리고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했던 기본적인 사랑의 원리조차 결혼 안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결혼 서약의 내용은, 각 커플들이 데이트 기간을 통해 얻은 교훈이나 공유하고자 하는 특별한 추억거리에 따라 각각 다양하게 표현되겠지만, 서약의 고백을 통해 담아내고자 하는 핵심 가치는 결국 한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고 본다. 한 마디로 하면 '죽도록' 사랑하겠다는 것인데, 이를 디테일로 풀어보자면 여기에는 구체적인 실천사항으로 상호 존경과 상호 복종이라는 원리 내지는 정신으로 서로를 대하겠다는 각오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경우를 만나더라도 상대를 존경하고,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겠다는 자세만 있어도 두 사람의 사랑은 결코 위축되거나 고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부부 간의 마땅한 자세를 언급하면서 바울이 에베소서 5장에서 굳이 사랑과 복종을 연결시키고자 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당시 가부장적인 상황에서는 모름지기 상호 복종과 아내 사랑의 이 권면은 가부장적인 구조 전체를 위협하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사랑은 구조적으로는 상호 존경에 기반한 일 대 일 관계 구도를 유지하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피차 복종하고자 하는 가운데 상호성을 확보하고 유지함으로써 친밀감을 증진해 나가는 것이라 하겠다.

 일 대 일 관계 구도에 흠집으로 작용하는 그 어떤 언행도 당연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리 되면 불평등 구조를 고착시키게 된다. 이것은 소위 '바운더리 이슈'가 되고 만다.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아우라'를 함부로 무시하거나 침범해서는 안 되며, 반대로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내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아우라'를 아무든지 함부로 무시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결혼이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배우자는 결코 내 소유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나와 함께 생의 중요한 부분/기간을 더불어 공유하도록 그리고 나아가서는 서로의 인격을 서로 보듬고 향유하도록 허용해 주신 것이지 결단코 내 소유가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또 소유로 삼으려 해서도 안 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결혼 관계가 신혼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장이 멈추는 데는 이러한 요인들이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데이트 관계는 아직 그 귀추가 불확실하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일 대 일 관계 구도를 어느 정도 불가불 유지할 수밖에 없지만, 결혼식을 '치르고' 혼인 신고를 끝내게 되면 가부장적 흔적이 여전히 잔존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존재가 아니라 소유로 서로를 대하게 되고 특히 남성보다는 여성이 부가적인 소유물로 간주되기 쉬운 취약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실천적으로도, 이제는 상호 복종보다는 자기 주장을 함부로 해도 괜찮을 정도의 안전한 관계라는 착각을 하게 되면서 결혼 관계는 이전 데이트 관계보다도 더 못한 관계로 후퇴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황금률을 원용해 보자면 '아내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대로 아내를 존경해야 하며, 남편에게 존경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편을 존경해야' 하는 법인데, 각자가 먼저 존경을 받기 위해 상대방을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하면서 급격히 서로를 깎아 내리게 되어 피차 자존감이 저하되고 서로를 부끄러운 존재로 대하며, 심지어 스스로도 부끄러운 존재로 여기게 되어서 더 이상 관계를 지탱할 용기를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되어 지루한 권태기로 빠져들게 된다. 결혼이 이런 것인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후회하기 시작하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마는 것이다. 

 결국 상대방을 잘못 선택했다기보다 결혼을 잘못 이해한 것이 더 근원적인 화근인 셈이 아니었을까? 데이트 기간 중에 서로를 존중하고 피차 복종하였다면, 결혼 관계 안에서는 더더욱 서로를 존중하고 피차 복종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랑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결코 소유하려는 자세와 양립할 수 없다. 바운더리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사랑은 결코 자라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상대방의 인격적인 바운더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운더리를 어떤 일이 있어도 범하지 않으며 지켜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바운더리 안에서 자발적으로 돌이키도록, 돌이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며, 받아주고 받아주고 또 받아주는 것이다. 이런 세심함과 부드러움과 푸근함을 무한정 리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결혼이란 이런 사랑의 토양을 구조적으로 확보하고, 또 선언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란 미명 하에 이런 토양을 파괴하고 찌그러뜨리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이야말로 결혼의 최대 위협이자 대적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세월 가부장제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제도로 정착되어 왔고, 또 심지어 지금 교회 안에서마저도 이런 '불평등' 관계 구도를 성경의 몇몇 구절을 문자적으로 확대 인용하여 정당화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오래 전에 회자하기 시작한 얘기지만, 결혼식 주례사의 본문으로 에베소서 5장을 읽으려 한다면 제발 22절('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에서 시작하지 말고 21절("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부터 읽어달라고 주문하는 신부들이 가끔 있어 왔다. 웃픈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원어로 읽어 보면 22절에는 아예 동사 자체가 생략되어 있어서 명백히 21절의 동사('복종하라')를 가져다 읽을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음을 생각하면, 이런 여성들의 주장은 타당한 근거를 지니고 있음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그런 주장을 신부가 직접 나서서 해야만 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주례를 포함하여 우리 남성들이 과연 예수님의 제자인지, 그리고 인간 관계의 정형을 보여주는 결혼의 그림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저으기 부끄럽고 한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차라리 신랑 될 사람이 나서서 21절부터 읽어달라고 해야 할 것이며, 나아가서 이런 주문을 받기 전에 주례는 아예 21절로부터 시작하여 사랑과 상호 복종의 원리로 신랑 신부를 축복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노라면 삶의 순간순간이 사실 이런 사랑과 복종의 결단이 요구되는 상황의 연속이다. 이런 순간순간이 모여서 결혼의 연륜이 되는 것이고, 그런 작은 결단들이 모이어 부부 간의 친밀감이 자라고 부부애가 성숙해 가는 법이다. 허지만 각자의 기질이나, 성장 배경 그리고 가치관 등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느냐에 따라 두 사람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해 가는 과정은 결코 수월할 수 없다.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게 되기까지도 시간이 걸리며, 그런 후에도 그 다름의 정도가 클 경우 여전히 용납이 용이하지 않으며, 또 그 틀림을 용서하기란 결코 용이하지 않게 마련이다. 

 대체로 빈번하게 부딪치는 경우를 보면, 1) 의사 결정과 관련하여, 2) 정서적 교감이 안 될 때, 3) 위기 상황을 맞닥뜨릴 때 등의 경우에 때로는 크게 마음을 다치거나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안이나 상황 자체가 갈등을 유발한다기보다 두 사람의 반응 방식으로 드러나는 사랑의 부재와 결핍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그런 상황이 사랑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랑이 상황을 컨트롤할 수만 있다면, 그런 험한 산을 함께 넘어보는 과정은 오히려 두 사람의 애정을 깊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법이다. 

 1) 우선 의사 결정을 앞두고 심한 이견 차가 노출되는 경우1), 그 결정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차분히 되짚어 보기만 해도 갈등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다. 갈등을 계기로 두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바나 삶과 사물에 대한 가치관을 오히려 엿볼 수 있게 된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실 이유 없는 고집이란 있을 수 없다. 고집을 부리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사소한 결정이라도 그 근저의 가치가 다르거나 반대되는 경우 이를 좁혀나가지 않으면 부부 관계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멩이로 발전할 소지는 항상 있다. 특히 매번 꼭 같거나 유사한 사안에서 갈등을 경험한다면, 그 근저의 가치관의 차이를 주목하여 보게 되면, 갈등의 해결이 용이해질 뿐만 아니라 서로의 관심사나 가치의 차이들이 노정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는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 

 2) 두 번째, 정서적인 교감이 무디어지거나 차단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정서란 일종의 거울이나 그림자와 같아서 마음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도록 되어 있다. 대개 두 사람 중 어느 쪽인가의 바운더리가 침범 받게 되면 마음의 문은 즉각 닫히게 마련이며, 정서의 센서는 자신의 바운더리를 보호하기 위해 즉각 방어 내지 나아가서 공격 태세를 갖추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리고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동안 친밀감의 촉이 무디어지거나 마비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또 다시 바운더리를 침범 받고 싶지 않은 나머지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게 되고 이런 방어벽이 두터워지면 질수록 서로 간에는 친밀감이 아니라 도리어 거리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안이 명백하여 두 사람이 다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면 차라리 해결의 장을 마련하기가 쉽다. 그러나 사안이 미묘하여 상대방은 전혀 눈치 채지도 못하고 있는데, 혼자서 감정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빠지는 경우가 문제이다. 이 경우에는 일단 내 느낌을 상대방에게 알려야 한다. 내 바운더리가 침범을 받고 무시를 받은 때, 상대방이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 아닌 경우 대개는 상대방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추측 내지 억측으로 단정 짓기 전에 일단 내 상황을 상대방에게 알릴 수 있어야 한다. 이 때에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 안에서 진실을 직면하는 것이다. 상대방을 비난하거나 견책(譴責)하기 위해서보다 내 느낌이나 상태를 전달하기 위함이 일차적인 목표이며, 일단 이 첫 단계가 시작이 되면 해결의 과정은 차차 진행되게 마련이다. 그동안 "나-전달법"(I-Message)을 숙지하고 숙달해 놓은 경우라면 이런 직면이 훨씬 용이해질 것이다. 

 부부 간의 관계란 참으로 미묘하여 감정의 미세한 온도차도 즉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서적 온도차가 맞지 않을 경우 늘상 얼굴과 살을 맞대어야 하는 부부 관계는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일 수 있다. 5분 간 직면할 수 있으면 충분한 사안을 두고 5시간 내지 5일씩 끌면서 갈등이 확대 증폭되어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직면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물론 이런 부정적인 접근만으로는 언제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서로의 친밀감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평소에 서로 물을 주고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애정 확인이 가능한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요소가 끼어들게 되는 경우가 생겨도 서로가 즉각 감지하게 되며 또 진심어린 사과 한마디만으로도 얼른 털어버릴 수 있게 된다. 

 사랑이란 결국 얼마나 많은 부분을 함께 공유하고 교감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까지도 헤아려주고 보듬어줄 수 있게 된다면 부부 간의 결속은 더욱 단단하게 다져질 것이다. 결혼 생활의 연륜은 바로 이 결속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하리라. 반대로 뭔가 교감의 정도가 둔화된 느낌을 받는다면 결속을 방해하는 요소가 끼어들었다는 반증으로 보고 새로운 결속으로 나아갈 기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3) 마지막으로, 위기 상황에서도 상황 자체가 아니라 서로의 인격이 우선한다는 원칙은 두말 할 여지가 없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상대방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당면한 상황 수습에만 급급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기가 쉽다. 애정보다 생존이 우선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지닌 실존적인 취약성 내지 한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애정은 생존을 능가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버리는 것'보다 더 큰 우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적어도 혼인 서약으로 맺어진 부부 관계에 우선적으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생존이란 사랑을 위한 것인데, 사랑을 희생하면서까지 생존을 선택한다면 이는 결국 무의미한 선택이 되고 말지 않겠는가? 적어도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 되는 한-몸 관계인 부부 관계는 이런 사랑, 곧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줄 수 있는 부부애로 승화할 수 있어야 하리라. 결혼식에서 우리는 바로 '이런' 정도의, 이런 '차원'의 사랑을 하겠노라고 서로 약속했던 것이다.

 사노라면, 크고 작은 위기 상황이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의 애정을 시험하려 들 것이다. 공방전을 치르다 보면 항상 승리만 하여 서로 간의 애정을 확인하고 다질 수만은 없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때로는 위기 상황이 주는 시험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처절한 패배를 겪기도 하겠지만, 이 때도 역시 다른 한 사람이 다시 손잡아 주고 격려해 주고 함께 싸워간다면 위기를 겪지 않았을 때보다 한 차원 더 깊은 친밀감으로 부부애가 더욱 성숙하고 결속되어 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으니, 실패 자체도 또 다른 위기 상황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기회로 기꺼이 활용할 수 있어야겠다.

 이렇게 보면 결혼은 무엇보다 사랑에 기반하여야 하며, 또 사랑을 목표로 나아가야 하며, 끊임없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가 함께 사랑의 사람이 되어가는 여정인 셈이다. 그리고 자연인으로서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사랑‘의 능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바, 곧 믿음의 절박성을 재삼재사 확인하는 과정이 또한 결혼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이냐 생존이냐의 갈림길에서 생존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하기는, 믿음이라고 하는 마지노선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이상 거의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 부부의 작은 사랑을 온전한 모습으로 빚어가는 과정이 결국 결혼이며,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사랑이 제 일 가는 아름다움이요, 영광스러운 가치이기에 혼인의 서약을 맺고 그 약속을 지켜내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쏟아 붓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을만한 영광스러운 일이요 소명임에 틀림없다. “‘사랑을’ 믿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이며, 사랑을 만드신 분께서 능력 주실 터이니 그 분 안에서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으리라!!”

[각주]
1) 이견차로 인해 정서적인 거리가 벌어지기도 하고, 또 사안이 복잡한 경우엔 이 세 가지가 모두 겹쳐서 나타나겠지만 견해차로 인한 갈등만인 경우는 비교적 다루기가 쉬운 편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정서)을 연루시키지 않은 채 사안만을 두고 우선 대화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영석(전 학원복음화협의회 상임대표)
"회복에 대한 예후가 불확실한 이 땅에서 어느새 6학년에 들어섰지만, 복음의 은혜와 그 핵심 가치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가 되어, 명멸하는 이 땅의 교회를 정화하고 어둠에 잠긴 이 겨레에 희망의 새벽을 깨우는 것을 보고픈 열망은 아직 잠재울 수 없어서 때늦은 홍역을 치르는 아이처럼 조급한 마음만 더욱 다그치는 중"

 

youngseokwo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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