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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특집 1] 이성 교제 가이드라인 1 _ 권영석 & 송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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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복협 작성일16-05-04 14:07 조회5,7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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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정소영 감독, 신영균/문희 주연, 1968)이 대흥행을 하던 당시의 연애관념은 어떠했을까? 주제곡 '미워도 다시 한 번'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그야말로 '이 생명 다 바쳐서 죽도록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 시대의 이상적인 연애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각종 데이팅 앱(앱팅)이 등장하고, 즉석 매칭 프로그램이 TV 화면을 버젓이 장식하고, 원나잇 스탠드가 일반 명사처럼 되어버린 오늘날의 데이트 풍속도에 비추어 보면 이는 참으로 구시대적인 관념이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쩌면 이 시대가 보여주는 현상적인 연애 풍속도와 달리 요즈음 사람들이 동경하는 이상적인 연애상은 여전히 그닥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이미 클래식으로 분류될지 모르지만, 영화 '봄날은 간다'(허진호 감독, 유지태/이영애 주연, 2001)의 엔딩을 보면,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은수의 갈급함과 '변하는 사랑'에 대한 상우의 씁쓸함을 교차시키는 엔딩 장면은 아마도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인간의 이상적인 관념은 그렇게 쉽사리 변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게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상우가 이따금 흥얼거리는 노래가, 아버지의 십팔번에서 영향을 받은 탓인지는 몰라도, 바로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주제곡이었다는 사실은 순정에 대한 관념이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여전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또한 결말에 가서는 결국 다시 해후하는 것으로 처리한 영화, '연애의 온도'(영어 타이틀은 'Very Ordinary Couple', 노덕 감독, 이민기/김민희 주연, 2013)가 보여주고자 하는 가치관 역시 여기서 크게 다를 것 같지 않다. 연애란,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이 언제나처럼 반복되듯이, 또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삶 속에서조차도 늘 한결같고 변함없이 함께 있고 함께 하려는 그런 사랑/사람을 만나고 알아가고 배워가는 과정에 다름 아닐 거다. 얼마전 종영한 드라마 '태양의 후예'(극본: 김은숙/김원석, 연출: 이응복, 주연: 송중기/송혜교, 2016)가, 비록 특전사 지휘관과 외과 의사 사이의 러브 라인이라는 극적인 설정이어서 더욱 짠하였던 것이 사실이나, 국경을 뛰어넘어 '태후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던 것을 보면, 그야말로 '목숨 걸고' 하는 사랑 이야기라야 역시 순애보라는 생각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에 매한가지로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닐까?

 

연애 왜 할까: 낭만의 실체

 모든 것을 화폐 가치로 수량화하는 소비주의 사회에서 '설레임'이나 '그리움'과 같은 낭만적인 정서의 실체를 제대로 잡아내기란 쉽지 않다. 우선 현대인들은 보이는 현상을 넘어 그것들이 지향하는 목표 지점 또는 낭만의 원천적인 밑그림에 대한 생각을 할 만큼 한가하고 차분한 시간을 내기가 어려운 시대를 산다. 그리고 매사를 '주고-받는' 쇼핑 등식으로 환산하는 버릇이 사회 구조나 체제, 그리고 개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DNA처럼 붙박혀 있어서 설레임과 같은 고도의 전인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의 실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도리어 왜곡시킨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기껏해야 심쿵한 모든 것을 스킨십의 자극의 깔대기로 관능화시켜 버리든지, 적게 주고 많이 얻어내려는 자본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물질화시켜 버리고 있는 것 같아서다. 오죽하면 요즈음처럼 학교 비지니스 내지는 취업 학원이 되어버린 듯한 대학 캠퍼스에서는 낭만이 아예 사라졌다고들 하지 않는가? 브로콜리 너마저가 부른 '졸업'의 가사처럼 이제 대학생들의 관심은 기껏해야 '짝짓기' 수준일 뿐 낭만이니 순정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흘러간 시대의 신파조 취급을 받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돈을 주고 사고 팔거나' '쓰고 버리는' 상품으로 환원할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인간은 현실적이기보다는 끊임없이 현실을 뛰어넘으려고 도전하는 초현실적인 존재, 곧 '낭만적'인 존재로 지어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낭만을 동경하게 마련이다. '짝짓기'란 결국 인간의 이런 절박한 욕구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추구해야할지 모르는 까닭에, 그나마 왜곡된 방식으로라도 충족시켜 보려는 젊은이들의 몸부림일 수 있다는 말이다.

 아담 이래 빗나간 인간의 삶은, 에릭 프롬의 표현을 빌자면, 존재가 아니라 소유에 달려 있다고 하는 왜곡된 신념의 굴레/우물 안에 갇히고 말았다. 약술하자면, 인간은 누군가에게 소유당하거나 예속당하는 것으로는 존재의 의미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반대로/그렇기에 뭔가 인간보다 못한 것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존재는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왜곡된 관념은 끊임없이 뭔가를 많이 소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장할 수 있는 양 착각하게 만들었으며, 그러다보니 심지어 결코 소유해서는 안될 존재인 인간까지도 소유와 예속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고, 반대로 누군가에게 소유를 당하는 편이 차라리 자신의 존재를 안전하게 지키는 것인 양 착각하거나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소유로 전락시키는 비굴한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해서 인간 사회는 동물의 정글처럼 되고 말았다. 늘 자신의 힘을 과시하거나 타자의 힘을 경계하고 나아가서 선제적으로 위협하느라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피곤한 인생/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용납해 주는 세상, 곧 '존재'의 세상(아가페 공동체)에서 살면서 무조건적인 사랑(아가페 사랑)을 받고 싶은 원초적인 욕구를 지니고 태어난다. 한 마디로 우리 인간은, 존재 자체를 가장 상위의 가치로 여기기에 존재 이외의 다른 조건들(예컨대 소유)은 무엇이든지 존재에 종속적/하위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돌릴 수 있는 존엄하고 고상한 존재들이다. 해서 우리는 힘/폭력의 논리가 아니라 사랑의 논리를 존재 원리로 삼을 때라야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힘으로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으로 품고 보듬어 주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또 스스로 그런 인생이 되고자 애쓰게 되어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치부한다 해도, 적어도 한 사람, 언제나 한결 같이 나를 있는 그대로 대해 주는 그 사람이 곁에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바로 그런 사람, 그리고 그런 사람의 푸근함과 넉넉함에 대한 설레임이 우리의 존재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 순간에 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있고 또 함께 하고 싶은 동경 내지 욕구가 바로 설레임이나 그리움과 같은 낭만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며, 이 아가페적인 사랑이 바로 진정한 우정과 연애 감정의 본질인 셈이다.

 따라서, 봄비 후에 피어나는 목련이나 개나리 꽃을 보거나, 싱그러운 녹음 사이로 흘러 나오는 매미소리나, 낙엽 떨어져 뒹구는 소리를 듣거나, 아니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날리는 눈발에 옷깃을 여미면서 문득 알 수 없는 '쓸쓸함'과 '아련함'에 젖어 들게 되고, 앞서 가는 연인들의 모습이 왠지 부러워 보이고, 나도 그 '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막연한 그리움이 싹트기 시작한다면, 이야말로 나도 인간의 반열에 속해 있다는 반증이며, 해서 그 무엇보다 축하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연애란 인간의 존재론적인 특성에 기인하는 사람됨의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밖의 세계에 있는 타자와 연합하고 결속하고자 하는 태생적인 욕구를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연애 감정/욕구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께서 3위가 1체로 결속되어/연합하여 존재하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갈급함이며, 나아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실존적인 갈망 내지 결핍감에서 생겨나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연애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어찌보면 인간의 조건에 중요한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물론 연애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수 있겠지만, 그 경우에도 대부분은 연애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이나, 자신은 좋은 연애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하는 부정적인 자아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연애야말로 인간의 성장과 성숙의 중대한 과제이자 동시에 엄청난 특권이라고 하겠다. 성년의 날을 맞이하거나 사춘기에 들어서는 아이들을 축하하는 건 결코 의례적이어선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연애를 연애답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연애의 유익: 발달심리학적 과제에 비추어

 방법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번에는 인간의 성장 과정에 비추어서 연애의 의미를 좀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실 인간은 앞에서 언급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공동체를 원초적으로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먼저 경험하게 된다. 아기를 위한 최적의 공간으로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 바로 어머니의 자궁이다. 물리적 생리적인 환경 면에서도 그렇지만, 심리-사회적인 환경면에서도 어머니와 아기는 탯줄을 통해 완벽하게 연결되어 있다. '있는 그대로'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이 둘은 하나이다. 서로가 운명처럼 결속되어 있는, 그야말로 태생적으로 완벽한 공동체에서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받고 자란다. 이쁘면 젖 주고 이쁘지 않으면 젖 안 주는, 뭔가 쓸모가 있으면 귀여워하고 쓸모가 없을 것 같으면 귀여워하지 않는 관계, 철저하게 주는 주고 받는 관계 곧 조건적인 관계는 적어도 모성애와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내' 아이이기 때문에, 나의 분신이기 때문에 도리어 나를 희생해서라도 보살피고 챙겨주는 무조건적인 희생 관계, 이것이 바로 부모-자녀의 관계요, 가정의 울타리가 아니던가?!

 혹자는 가정이란 언제나 대문이 활짝 열려있는 곳,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찾아갈 수 있으며, 언제나 환대 받을 수 있는 곳이라 정의했다. 이 가족 공동체가 그리고 이 아가페 사랑이 인간을 (동물이 아니라) 인간답게 주조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태어나기도 하지만 또 죽어야 하는 존재이기에, 세대가 바뀌면서 가족 구성원의 역할도 바뀌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부모 세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자녀가 이제 성년이 되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또 그 새로운 울타리 안에서 다시 부모가 되고 새로운 자녀를 양육하게 되는 것이다. 사춘기는 바로 이런 성장통 내지 위기적 전환기로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독립한 인격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인 셈이다. 지금까지는 부모에게 의존하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제는 일방적인 의존 관계 차원이 아닌 일대일의 상호의존 관계를 통해 쌍방적인 관계로 발전/전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쌍방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통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공급받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모성애 관계가 연애 관계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독립을 배우기 시작하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는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쌍방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배워 나가게 된다. 이런 관계는 동성 친구 관계로 발전하고, 나아가서 이성 친구 관계, 그리고 결혼/한몸 관계라는 더욱 친밀한 연합과 결속의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 새로운 연합을 통해 또 새로운 자녀 세대가 출현하게 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인간의 역사는 대를 이어 계속 되는 것이다.

 나를 기준점으로 이야기하자면,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 나는 완벽한 의존 단계에 있지만, 몸과 마음이 점차 자라나면서 독립 단계로 성장하게 되고, 사춘기를 겪으면서 친구들을 사귀고 또 이성교제를 하게 되면서는 상호-의존 단계로 진전하게 되어, 드디어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되면 도리어 자녀들의 의존 대상이 되는 피의존 단계로 성숙/진전하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일방적인 아가페 사랑의 원천이었다가, 이제는 배우자가 쌍방적인 아가페 사랑의 공급원이 되고, 결혼 후에는 부부가 함께 자녀에게 이 아가페 사랑을 공급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인간의 성장이란 이처럼 관계 구도의 전환/진전을 겪어 나가는 과정이며, 또 그런 변화 내지 전환의 과정에서 사랑의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더해 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는 수혜자 곧 시혜 대상이던 존재가 차츰 독립적인 존재, 곧 사랑의 주체가 되어서, 상호 간에 주거니 받거니 하는 쌍방적인 사랑을 하는 단계로 전환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제 타자를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는 시혜자로 여물어 가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의 발달심리학적 관점에서 이해해 보자면, 인간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아정체성이 확립되고, 자아가 안정적으로 확립된 사람들은 이제 타자와 친밀한 관계 형성을 해나갈 수 있게 되고, 나아가서 각자의 인생에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고 성취해 가게 된다. 따라서 자아정체성을 확립하고 친밀한 관계 형성을 배우기 시작하는 초기 청년기에서 연애가 차지하는 비중은 당연히 높을 수밖에 없으며, 어쩌면 장차의 소명을 위한 준비 못지 않게 반드시 세심한 주의와 '투자'가 필요한 곳이 바로 이 연애의 영역이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청년들의 관심사가 연애 아니면 취업준비로 압축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작금의 상황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 아니고 인간의 발달 과정상 불가피한 과제이기 때문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성숙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결국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숙한 관계를 맺고 또 관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할 텐데, 관계의 성숙도는 결국 사랑의 성숙도 곧 어떤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가 하는 문제는 두 사람의 사랑의 질 내지 사랑의 결이 어떠하냐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을 받고 싶어 하지만, 문제는 누구나 다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을 주는 것은 결코 간단하게 치환될 수가 없다. 의존 단계에서 독립의 단계로 전환/발달하기까지 인간은 오랜 시간이 걸리도록 되어 있다. 여타의 대동물과 달리 사람은 태어나서 성인이 되기까지 20년 이상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아마도 이 때문이 아닐까? 즉 사랑의 능력은 결코 하루 아침에 배양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이 사랑을 배우고 또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이런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육체를 지니고 시공간의 물리적 제약 안에서 살도록 되어 있는 인간에게는 사실 가능하지가 않다. 인간의 이런 실존적인 제약 때문에 박애(博愛)란 자칫 박애(薄愛)가 되기 쉬우며, 박애주의자가 되는 것이 그만큼 숭귀한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결혼'이란 울타리 안에서 한 사람, 오직 '그' 한 사람과 이런 아가페 사랑을 배우고 나누도록 하신 것은 한편으로 불가피한 조처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사랑을 연습/실습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일부일처의 결혼 제도가 '불가피한 조처'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태생적인 제약을 감안하여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 사람에서 출발하면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의미이다. 일단 우리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과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으면 된다. 우리의 목숨이 하나 뿐이기에, 적어도 한 사람에게 이 목숨을 줄 수 있으면 되며, 또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목숨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 결혼이 '이상적인 환경'인 까닭은, 사랑의 속성 상 '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라야 이런 아가페 사랑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내게 있는 모든 것, 나아가서 나의 전부, 곧 자아 전체를 내어주는 것이라면, 이는 결코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부를 주는 사랑은 절반씩 내지 한 부분씩을 나누어 주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사랑이다. 여기에 사랑의 배타적 내지 선택적인 속성이 있다. 아가페 사랑의 이상적인 실현의 장으로서 결혼의 개념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성과 여성이란 양성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거기에 삼위일체적인 속성을 부여하신 것은 바로 양자일체적인 연합을 통해 3위1체 하나님의 연합을 경험하고 또 반영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셨다고 하겠다. 즉 존재론적으로 인간은 2위1체적인 존재로 지음받았으며, 이 때문에 일대일의 연합을 하기 위한 대상을 찾고 또 찾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고대 유물 가운데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상체는 각각 별도이지만, 하체는 함께 붙어 있는 형상물이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존재론적인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 틀림없다. 말하자면 창세기 2-3장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특성을 조형물로 가시화해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결혼으로 대표되는 이런 연합의 관계 안에서는 에로스나 아가페의 구분이 필요없게 된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것이며, 나를 사랑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결혼 서약을 행동으로 유비화하는 성행위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어 준다 하겠다. 그야말로 아가페와 에로스가 하나로 만나는 관계가 바로 결혼 관계이다. 따라서 연애가 결혼을 전제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결혼을 그 밑그림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일이며, 실제적으로도 그런 밑그림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연애 본연의 의미를 살리기/경험하기 위해서도 유익한 가이드라인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본다.

 다만 결혼 관계/제도를 아가페 사랑의 이상적인 장으로 이해한다고 할 때, 이는 결혼 자체를 절대시/우상화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실제로 인간의 삶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또 결혼만 하면 만사형통(happily everafter)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그런 아가페 사랑의 울타리(커뮤니티) 안에서 그런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고/계시하고/각성하고/상기시키고, 그 사랑의 특성을 좇아가기 위해 전형적인 모범으로 삼도록 한 이상적인 그림으로서, 유구한 역사의 검증을 거쳐서 살아남은 것이 바로 결혼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결혼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 곧 아가페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는 메타포이며, 나아가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메타포인 셈이다.

 이런 메타포의 역동이 시작되는 출발점, 이런 메타포가 유비하는 바 아가페 사랑/관계의 아름다움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바로 연애라고 한다면, 연애는 우리 인생에 반드시 배워야 할 감정이며 익혀야 할 기술이라고 해도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제 담론은 이 정도로 하고 방법론으로서 연애의 기술을 생각해 보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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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석(전 학복협 상임대표) / 송경숙(카운셀러)

"회복에 대한 예후가 불확실한  땅에서 어느새 6학년에 들어섰지만복음의 은혜와  핵심가치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가 되어, 명멸하는  땅의 교회를 정화하고어둠에 잠긴  겨레에 희망의 새벽을 깨우는 것을 보고픈 열망은 여적 잠재울 수 없어서 때늦은 홍역을 치르는 아이처럼 조급한 마음만 더욱 다그치고 있는 중"

 

youngseokwon@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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