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복음화협의회

탈북, 그리스도인, 대학생, 그리고 나 - 노을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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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복협 작성일17-07-24 18:15 조회92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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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8일, 수원 경기대학교에 재학하던 탈북 대학생 노을 자매를 만났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 근처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나눈 대화를 정리해서 올려드립니다. 하나님, 북한, 남한, 대학생, 그 모든 정체성 기원의 교집합이자 총합, 그 너머인 '노을' 한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노을(가명)이란 이름을 쓰고 있고요, 93 또래 24살입니다. 지금 경기대학교에서 문헌정보학과, 복수 전공으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름을 영어로 하면 노엘(Noel)이 되는데 예뻐서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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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의 삶과 어떻게 북한을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나오는 과정을 가능한 선에서 얘기해주세요.
 딱히 숨길만한 것은 없어요. 아버지가 먼저 한국에 와 계셔서 어머니와 함께 온 거예요. 물론 그 전에 ‘중국으로 넘어가서 살아봐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는 했는데, 아버지가 제가 12살 때 먼저 나오셨거든요. 아버지가 나오시고부터는 계속 소식을 기다리고, 연락이 닿아 아버지의 인도 하에 17살 때 나왔어요.
 그때가 2009년 10월 중순 쯤에 집(함경북도 온성)에서 나왔었어요. 여기 도착한 시간이 12월 10일이니까, 중국에서 일주일 정도, 40일 정도는 제 3국에 있었죠. 태국에도 좀 있었어요. 저는 직행으로 온 경우에요.
 북한에서는 초등학교 과정만 나오고 학교를 안 다녔어요. 집에서 놀거나 어머니와 장사나 농사를 하며 지냈어요. 여기 와서 중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고등학교를 여명학교에 다니고 대학교에 들어갔어요.

하나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남한에) 오자마자 부모님이 있긴 한데, 다른 가족이나 친척, 친구가 없잖아요? 그래서 처음에 동네 언니를 따라서 친구 만나려고 교회에 갔어요. 그러다 청년부 수련회를 갔는데, 불현듯 탈북 과정에서 중국 공안에게 붙잡힐 뻔한 기억이 났어요. 원래 그 구간에서 검사를 안 한다고 해서 탄 버스였는데, 갑자기 멈춰서 공안들이 올라와 신분증 검사를 했었어요. 발각이 되면 바로 북송이 되는 거라서 일행들이 벌벌 떨었는데, 그때 제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었거든요. 고향에 있을 때는 종교가 허용이 안 되다보니까 단 한 번도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중국 버스에서 너무 긴박하고 숨 막히니까 ‘하나님 제발 살려달라’고 기도를 한 기억이 수련회 동안에 갑자기 나더라고요. 그 생각이 나서 교회를 계속 다녀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교회를 다니다가 여명학교를 갔어요.

마침 오늘(2016년 11월 18일)이 여명의 날이죠?
 맞아요. 오늘 저녁에 행사에 가요.
 물론 처음에 하나님을 믿기는 어려웠어요. 북한에서는 눈에 보이는 김일성, 김정일을 믿다가 보이지 않는 신을 믿으라고 하니까 어려웠거든요. 그런데 학교 선생님들과 저희를 도와주시는 모든 분들이 다 그리스도인인데, 그분들을 보면서 ‘저분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헌신하고 사랑하며 보듬어주시는가’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이분들에게서는 진심이 느껴지거든요. 그래서 이분들이 믿는 신이 내가 긴박할 때 찾았던 그 신이면 믿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나 봐요. 이제는 하나님과 교회와 떨어질 수 없게 되었죠.



믿음 여정에서 어떤 사건이 또 있었나요?
 제가 기독교 학교를 2년을 다니면서 믿음이 많이 커졌다고 느끼긴 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 와서 생각이 깨지게 되었어요. 고등학교에서는 반 인원도 적었고, 제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선생님과 반 친구들이 다 가족이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서는 혼자잖아요. 내가 수강신청을 해서 수업을 가야 하고 과제도 찾아서 해야 했죠. 단 한 번도 혼자서 뭘 해본 적이 없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고향에서도 엄격하게 하라는 것만 하면 됐었는데 말이죠. 그런 생활을 해오다가 대학에 와서 모든 걸 혼자 해야 한다는 게 무척 당황스럽더라고요. 여명학교 때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다 보니까 그들의 믿음도 제 믿음이라고 받아들였었는데, 대학에 와서는 혼란이 많이 찾아오고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생긴 것도 이때였어요.
 교회를 출석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혼란 속에서 신에 대한 존재 이유를 묻는 등 3학년 1학기까지 물음을 계속했어요. 계속 묻다 보니까 우연치 않게 답이 생기더라고요. 교회에서는 신 자체를 의심하지 말라고 들었지만, 계속 물어야지 틀리든 맞든 제 것인 답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질문을 계속 하니까 (오히려) 하나님이 정말 저에게는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어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무섭게 표현된 부분들이 저에게 많이 다가왔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졌어요.

남한 사회에서 탈북민으로 살아갈 때 일화가 있나요?
 대학교에서는 차별을 별로 못 느낀 편이에요. OT 때도 바로 고향을 소개했어요. 사람들이 몰려오긴 했죠. 궁금한 게 많잖아요. 조금 지나면 신비감 없이 지내게 돼요. 그리고 제가 적응을 빨리 하는 편이라 한국 사회에서 느끼는 차이도 그냥 받아들여서 별 어려움을 못 느꼈어요. 사는 것도 굉장히 좋았어요. 자유가 없던 곳에서 자유가 있는 곳으로 왔고, 굶지는 않았지만 가난하게 살다가 여기에서는 그렇게 가난하지는 않으니까요. 삶에서 불편한 건 없고, 심적으로는 고향이 가고 싶은 느낌이 있죠. 이건 누구나 다 있는 거고요.

이곳에서 살아가는 데에 정체성과 관련한 문제가 있다면 나눠주세요.
 정체성 혼란이 찾아오는 큰 계기가 있진 않았는데, 여명학교 다닐 때 ‘북한에서 태어난 게 잘못된 건가’라는 생각을 잠깐 했었어요. 기숙사 친구들과 명동에 쇼핑을 나간 적이 있어요. 물건 가격을 물어봤는데 만원이래요. 두 개는 만 오천 원이라고 하고요. 제 옆에 있던 친구가 ‘이거 주세요’라고 했는데 그 친구가 사투리가 심한 친구였어요. 그러니까 갑자기 만 오천 원이 이만 원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가 방금 물어봤는데 왜 갑자기 가격이 오르냐고 하니까 판매하는 아주머니가 ‘사기 치려면 사지 마라’고 했어요. 화가 나잖아요. 방금까지 만 오천 원이라고 해서 돈을 준비했는데 갑자기 이만 원이라 하니까요. 그래서 왜 이러나 싶었는데, ‘연변 것들이 와서 명동을 흐려놓는다’ 이런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때 화가 나서 친구이랑 엄청 울었었거든요. 아, ‘중국 것들’이라고 했나? ‘중국 사람들은 사람도 아니냐’라면서 혼란이 많이 왔었죠.
 그리고 신발 가게에서도 저희 말투가 티가 나니까 어디서 오셨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지금은 티가 나도 상관이 없는데 그때는 이미 말투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안 바뀌니까 괴로운 상태였거든요. 저희가 고향을 밝히고 ‘여기(북한) 분들 한 번도 못 만나 보셨냐’고 하니까 그분이 못 만나는 게 아니라 안 만난대요. 그래서 또 상처를 받고 돌아왔어요. 못 만나는 게 아니라 안 만난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거부를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후에는 딱히 이렇다 할 혼란이 오지는 않고, 주변에 누가 차별을 당한다거나 혼란을 겪고 있다는 걸 보면서  전체적인 입장에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저번에는 간첩 조작 사건도 있었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저희가 사회적 약자라는 입장이 조금 들었어요. ‘탈북민’, ‘탈북자’, ‘새터민’이라는 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뜻도 그런 의미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북에서 온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를 들으면 아직 우리는 사회적 약자이고, 보호 받아야 하는 느낌이 강해요. 안 좋아하는 단어인데 딱히 지칭할 만한 말도 없고요. 여기(남한) 사람들이랑 똑같은 사람들인데, 사회적으로 규정을 해놓으니까 힘들더라고요. 개인적이라면 ‘너는 그렇구나’하고 지나칠 수 있는데, 공공연하게 뉴스에서 다루면 사회적인 시선이 그렇게 흘러가니까요.

고향이 그곳일 뿐인 거잖아요?
 한반도에서 고향이 함경도인 것뿐인데, 굉장히 다른 나라 취급을 하는 경우도 많아서 정체성 혼란이 여전히 있어요. 물론 저는 여명학교 들어오기 전에 말투를 빨리 바꿔야한다는 생각에 7개월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발음 연습을 많이 했어요. 여명학교에 와서는 초기에 사투리를 안 쓰다가 친구들과 있을 때는 쓰기 시작했어요. 저는 조절이 가능해서 개인적으로 북에서 왔는지 물어보는 오셨는지 얘기를 많이 듣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제 친구들 중에는 말투가 쉽게 바뀌지 않다 보니까 그런 대우를 많이 받나 봐요. 그 친구들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 같아요.

2038584557_1500886874.1467북한 지도.


안타깝습니다. 지역 사투리인데, 말투를 왜 바꿔야 할까요.
 그러니까요. 부산 사람이 부산 사투리 쓰는 건 그 사람이 부산 사람이니까 그런 건데, 유독 북한 사투리에는 날카롭게 반응하더라고요. 요즘 저는 일부러 사투리를 쓰려고 혼자 연습해요. 이제는 기억이 잘 안 나니까요. 17년 동안 쓴 말인데 몇 년 안 썼다고 갑자기 잊히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고요.

 『와이 미?』란 책을 보면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오래 한 저자가 한국말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경우도 있고, 얼마 전 북한인권영화제에서 상영된 <공채사원>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특이한 경우가 있어요. 북한에서 산 기간보다 남한에서 산 기간이 훨씬 오래된 청년이 있는데, 취업을 하고 보니 정규직에 예정된 자신과는 달리 자신 때문에(?!) 정규직에서 밀린 선배가 있고, 회사는 탈북 청년을 뽑았다고 회사 이미지를 포장하죠. 회사가 지원금도 받나 그럴 거예요.
 보여주기 식이죠. 제가 알고 있는 동포 중에는 이런 일도 겪었다고 해요. 회사에 후배들을 소개해줬는데, 그 후배들이 자신보다 1~2년 더 많은 연봉을 받더래요. 회사에 이유를 물었더니 ‘우리니까 너 받아주지’라는 투로 말했다고 하더라고요. 능력은 훨씬 더 뛰어나도 북한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서 상처를 받았대요.
 대학에 들어갈 때도 특별전형으로 입학하고, 등록금을 안 내도 되는 혜택을 받아요. 혜택이 없으면 대학에 가기 힘들어서 받기는 하는데, ‘너희는 받으니까’라는 사회적 시선이 모순적이에요. 제가 이기적일 수도 있죠.

영화 <공채사원>

한국 사회에서는 내가 못 받는 혜택을 남이 받으면 참기 어려운 것 같아요. 그런데 북한에서 와서 남한에서는 기반이 없잖아요. 그래서 지원을 하는 게 당연한 거겠죠.
 출발선을 같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거죠. 물론 이걸 당연하게 여기는 (북한 출신) 사람이 없지 않아 있어서 안타깝긴 하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아요. 여기서 괴로운 게 있는데, 저희(북한 출신)가 이제 3만 명이 됐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수다 보니까 한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면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좀 힘들어요.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이 더 부각되고, 좋은 일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탈북민 전체는 이렇다’라는 인식이 박히잖아요.

그런데 한국 내에서 북한 출신뿐 아니라 중국인이나 동남아인이 사고를 치면 중국인이나 동남아인 전부 나가라는 여론이 있거든요? 그런데 유독 서양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유별나게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해요.

재작년에 세월호가 가라앉고 유가족들에게 배상 논의가 어떻게 되었나를 이야기할 때 딴지를 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택시 기사가 유족 부모에 (보상금을 받으니) 로또 당첨됐다고도 그랬죠.

요즘 한국 대통령 퇴진 시위가 있잖아요? 여기에 탈북하신 분이 마이크를 잡더니 ‘독재가 싫어서 탈북을 했는데, 내가 이러려고 남한에 왔나 자괴감이 든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자괴감이 많이 들죠. 그래서 지난 주 토요일에 광화문에 나갔거든요. 시대가 안타깝고 악하긴 한데, 이렇게 해서 광장이 꽉 차니까 국민이 단합되는 걸 실감할 수 있었어요. 이 시대 이 현장에 내가 참여했다는 게 굉장히 뿌듯하고 감사했어요.


사진: 고종구(<광장에 서다>)

이런 일이 북한에서도 있을 수 있을까요?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게 뭐 결론지을 수는 없는데, 만약에 일어난다면 광주 같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요. 거긴 정말 무지막지한 사람들이라서 한 개 도나 군을 밀어버릴 수 있는 있거든요. 소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북에 있을 때 어떤 사단에서 쿠데타를 준비했대요. 다음날이 디데이(D-Day)인데, 갑자기 사단장이 교체되었다는 거예요. 고발자가 있었던 거죠. 당연히 사단장은 공개 처형되었고, 사단 전체를 유배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소문이 아니었을까요?
 사실이라는 얘기도 방송에 나와서 몇 번 들었거든요. 사실일수도 있고, 소문일수도 있죠. 충분히 납득이 가능한 이야기에요. 이야기를 듣고 ‘한 개 사단쯤은’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군인들을 뭉개버릴 정도면 민간인들이야.’ 이렇게 태어날 때부터 세뇌되어 쿠데타 같은 생각이나 정부 비판을 감히 못해요.
 저는 공부할 때 질문이 안 나와서 괴로워요. 비판적인 생각을 못하겠어요. 2학년 때 한 시인을 비평해야 했어요. 시가 좋은데 완벽하게 살지 못한 시인을 왜 비평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그만큼 비판적인 사고가 안 생겨요. 어떤 것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면 안 되고 ‘이것이 옳다’를 외워야 했지 ‘이게 왜 이럴까’라고 한 번도 질문해 본 적이 없거든요. 북한은 질문을 못하게 하는 사회였으니까요. 그래서 질문을 하라고 하니까 못 하는 거죠.

그렇다면 스스로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전에는 주변에 계신 분들이 “너희는 통일의 주역이고 통일 시대의 리더가 될 사람들”이라고 이야기를 해서 정말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통일 시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맞고요. 그런데 요즘은 제 삶이 바빠서인지, 그 사명감이 강박으로 작용할 때도 있어서인지 그런 생각을 잘 하지 않아요. 통일은 당연히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강박은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제일 많이 생각하는 건 제가 행복하다는 거예요. 얼마 전 수업에서 “나의 정체성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명함을 만들라”는 과제가 있었어요. 저는 “나는 지금 행복한데, 당신은 행복하신지”라는 문구를 넣었어요. 저는 오늘만 사는 스타일이라서 오늘 즐겁지 않으면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해야 한다는 건 가당치도 않다고 봐요. 오늘이 즐겁지 않은데 내일 어떻게 즐거울까요. 차라리 내일 걱정하기보다는 오늘 준비를 하는데, 그 준비조차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고시나 공무원 시험은 제 스타일이 아니에요.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그 시간 동안 공부만 하는 건 제가 가장 하기 싫은 것 중에 하나에요. 그 정도로 제가 오늘만 사는 스타일이어서요. 오늘만 살다보니까 행복할 수밖에 없죠.

톨스토이의 『인생이란 무엇인가』에도 보면, “우리가 지난날을 괴로워하며 미래를 망치는 것은 오로지 현재를 경시하기 때문이다”라고 나와요.
 물론 유명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기는 했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식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해요.  ‘행복하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에 슬픔이나 걱정,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민조차 할 수 있는 나는 행복하다’라고 받아들여요. 제가 유별나서 그런 것 같아요.

‘그리스도인’, ‘한국 사람’, ‘통일 세대의 주역’. ‘대학생’ 등 여러 가지 정체성이 붙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떠나서 인간 ‘노을’을 잘 알 수 있네요.
 다 포함되는 것 같아요. 아직까지 시간과 자유가 많은 대학생이라서 좋아요.

4학년인데요?
 한가로워요. 그래서 좋고요. 물론 교회도 빼놓을 수 없죠. 제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성장을 하는 게 스스로도 보이고, 원래 자존감이 굉장히 낮은 사람이었는데 사랑을 받으면서 자존감이 많이 커졌거든요. 그래서 지금 행복하게 된 거고요. 자존감이 낮으면 행복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런 부분에서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행복해하게끔 안내해주시고, 보듬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분이라고 매일 생각해요. 한국 사회도 많은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은 점이 훨씬 많고요.
 제가 여기 와서 뼈저리게 느끼는 가장 안타까운 점은 고향을 못 간다는 것이에요. 그것 빼고는 다 참을 수 있어요. 차별을 받아서 잠시 혼란이 찾아와도 참을 수 있는데, 고향을 못 가는 건 가장 큰 안타까움이죠. 저도 그렇고 많은 친구들도 많이 울어요. 그것만 빼고는 다 행복해요.

거창한 주제일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한국 사회가 북에서 오신 분들을 어떻게 품어가야 하고, 어떻게 통일을 이루어가야 할까요?
 거창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 주제죠. 그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동의하기도 하고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 적도 있어요. 가장 동의를 많이 한 내용이 있어요. 지금은 (남한에 정착한 탈북민이) 3만 명인데 통일이 되면 2,500만이나 3,000만 명이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 많은 인원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지금 3만 명하고도 많은 차이가 일어나는데, 다수가 되면 그때의 혼란이 지금의 혼란과는 차원이 다른 재앙이 될 수도 있잖아요. 자라온 체제 차이를 서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그래서 이미 와있는 3만 명과 잘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아요. 3만 명 중에서도 생각이 다른 분들이 워낙 많고요. 구체적인 방법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사회 내에서 화목하면 좋겠어요. 같이 모여서 차 마시고 밥 먹다 보면 괜찮지 않을까요? 미디어에서 접하는 것과 실제로 만나는 것과 다르잖아요. 만나고 나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좋은 사람이라고, 나와 같은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만남의 장이 있으면 좋겠어요. 아직까지는 우리끼리(북한 출신끼리, 남한 출신끼리) 친한 경우가 많거든요.

일부 남한 사람들의 경우, 북한에 있는 사람들을 괴물처럼 인식하기도 해요. 인간이 아닌 다른 차원의 존재로 인식을 하면, 증오를 쏟아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만남의 장이 생겨야 해요. 요즘에는 북한 사람들을 다루는 방송이 많이 있어요. 통일을 준비하기에 좋은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많아요. 일부 방송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저희가 보면 분명이 아닌 내용인데 탈북하신 분이 나와서 북한 전체가 그런 것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북한에는 사탕 과자가 없다고 한 사람이 있어요. ‘그럼 우리가 어릴 때 먹은 건 뭐지? 돌멩이를 먹었나?’ 그렇게 말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실로 받아들이더라고요. 아직까지는 저희가 소수이다 보니까 한두 사람이 방송에서 우리를 대표하는데, 저렇게 이야기하면 남한 사람들이 그 말대로 인식할 거잖아요.
 제가 봉사 다녀왔을 때 다큐멘터리로 나간 적이 있어요.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 방송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거절했어요. 다른 곳이면 몰라도 거기 갈 일 없어요. 알려지는 걸 원하지도 않고요. 다만 제대로 된 내용을 내보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방송이 굉장히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하니까요. 그 방송으로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드럽게 바뀌기도 하고요. 하지만 시청률 때문에 너무 자극적인 소재만 다루지 않나 해요.


탈북민들의 토크쇼를 다룬 방송의 한 장면

동아일보의 주성하 기자님이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인데, 그 분에 따르면 남한에서 김일성종합대학 동문 모임이 있대요. 그래서 그 대학 출신이면 다 안다고 해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지적 수준이 드러나기도 하고요. 그런데 방송에 나와서 자신이 김일성종합대학에 나왔다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있대요.
 돋보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아는 사람도 출연을 했었거든요. 나와서 별로 하는 말도 없는데 나간대요. 어른들이 좀 더 과장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방송이 전파되면 저희끼리 이야기를 하고, 이건 전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우리 지역에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거듭거듭 강조하는 경향이 많아졌어요. 제가 이야기한 게 전체의 이야기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북한 교통이나 통신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까, 우리 지역 얘기가 될 수밖에 없어요. 전화를 하거나, 여기 소문이 저기에 나거나, 서로 연락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정말 우리 지역에 국한되는 건데, 그게 전체적인 것으로 보이면 안 되죠. 심지어 우리 동네라고 다 아는 것도 아니고요.

졸업 이후에는 어떤 길을 가고 싶어요?
 제 전공이 문헌정보학이잖아요? 도서관 사서를 하는 게 가장 쉬워요. 가장 많이 가는 곳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사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공공 도서관은 제 스타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요일도 쉬는 날이 없어서 교회를 가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고요. 그리고 제가 노는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노는 시간이 다른 사람이랑 겹치지 않으면 불안할 것 같아요. 물론 도서관에 있다고 해서 데스크에 앉아서 대출, 반납만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게 주된 업무이다 보니까 단조로운 직업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대학교 졸업할 때 전공이 주는 교훈은 4년 동안 한 공부가 너의 길이 아니었다고 깨우쳐주는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말을 굉장히 체감하고 있어요. 그런데 복수 전공한 문예창작과는 무척 재미있었어요.

부천에 뜰안에작은나무도서관이라고 있는데, 개장 시간 이후에는 음악 공연이나 마술교도 열리고, 지역 주민을 위한 강좌도 열려요. 지하는 홀로 만들었고요. 일요일에는 교회가 되기도 해요.
 도서관이 향후 추구해야하는 과제가 그것이거든요. 기존의 건물형의 도서관이 아니라 문화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가 있죠. 그런 도서관이라면 흥미가 있는데, 기존 도서관이라면 일할 수 있을까 싶어요. 도서관에서 일을 하라고 한다면 학교 도서관에서 일을 하고 싶어요. 교육을 받다 보니까교육에 관심이 있어요. 일을 좀 해보다가 정말 필요하다 싶으면 교육대학원을 가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요. 그런데 하고 싶은 다른 것이 또 생겨요.
 졸업하고 나서 고등학교에서 도서관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어요. 학교에서는 오라는 얘기도 했었는데, 정작 졸업 예정자가 되니까 그런 얘기가 없어서 학교에 가서 진지하게 여쭤봐야 할 것 같아요. 가고 말고는 제 결정이지만, 다른 게 하고 싶으면 안 갈 수도 있죠. 물론 전공에 관련된 일을 하면 내 능력을 쏟을 수 있어서 훨씬 좋겠지만, 즐겁지 않으면 하기 싫거든요. 제가 미련이 없다 보니까 하면서도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 문학 활동은 어떻게 하실 계획이에요?
 다른 일을 하면서도 계속할 생각이에요. 원래는 작가가 최종적인 꿈이어서 그것만 하려고 했는데, 문창과를 복수 전공하면서 다른 어떤 일을 하든지 충분히 창작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한 학기 동안 계속 생각한 건데, 어제야 주제를 잡고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어요. 틀을 좀 잡아야 해요.

어떤 주제인가요?
 저밖에 모르는 주제죠. 어제 저녁에 문득 떠오른 건데, 집에서 혼자 있는데 옆에서 TV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보통 이러면 방음이 안 되니까 화가 나야 하는데, 눈물이 확 나는 거죠. 어릴 때 살던 곳이 하모니카 주택이었고, 내 집이 판자로 구분되어 있고, 옆집이 친척보다 가깝게 지내고 온 동네가 다 가까웠던 게 생각이 났어요. 어릴 때는 TV가 없어서 다른 집에서 TV 소리가 나면 굉장히 부러웠어요. 그래서 판자에 귀를 대고 듣거나 판자 사이로 들여다봤었어요. 이런 기억이 나면서 고향 생각이 심하게 나더라고요. 그래서 어제 저녁에 슬프긴 한데, 또 행복했던 어릴 때 추억을 떠올리면서 이웃의 정이 사라져가는 걸 쓰려고요. 요즘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오히려 옆집 사람을 마주치는 걸 굉장히 꺼려하고 피하려는 게 심하잖아요. 그런 걸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어제 저녁에 들었어요.
 물론 잘 써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글을 시작하기가 힘들고, 잘 모르는 주제나 이슈가 되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면 더 쓰기 힘들어요. 그냥 가까이에 있는 친숙한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마음먹었죠.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있는 거니까요. 틀을 잘 짜야 하고, 글쓰기 책을 읽고 있어요.


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언제까지나 노을 자매의 삶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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